1세대 기업인… 스포츠계에도 큰 족적

입력 2014-11-10 03:15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왼쪽)이 1978년 코오롱 울산 석유수지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현지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코오롱그룹 제공
이 명예회장이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코오롱마라톤 대표팀을 찾아 고 정봉수 감독(오른쪽)과 이봉주 선수(오른쪽 두 번째) 등을 응원하는 모습. 코오롱그룹 제공
한국 ‘섬유산업 개척자’인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8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 명예회장은 국내 첫 나일론사를 생산한 1세대 기업인으로 재계는 물론이고 스포츠계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별세 소식에 이틀째 각계각층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이 명예회장은 1922년 경북 영일에서 코오롱그룹 창업주 고(故) 이원만 선대회장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 부친의 사업을 돕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낮에는 부친이 설립한 아사히공예사에서, 밤에는 흥국상업학교에서 공부했다. 1944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수료한 그는 조선학도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한 뒤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직물공장인 경북기업을 설립해 섬유산업에 처음 뛰어들었다. 1957년에는 부친과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설립해 국내에선 처음으로 나일론사를 생산했다. 창업자는 아니지만 부친과 함께 사업을 시작해 회사를 일으켰다. 1963년 하루 생산량 2.5t 규모의 나일론사 준공을 시작으로 1967년에는 공장을 증설해 하루 생산량 10t으로 확장했다.

이 명예회장은 나일론사 판매를 발판으로 1968년 한국폴리에스텔 등을 설립하고, 1977년에는 한국나이롱과 한국폴리에스텔을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합친 후 회장에 추대됐다. 나일론사 외에 타이어코드,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유통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해 코오롱그룹 성장 기틀을 마련했다.

1982년부터는 14년간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으로 재계를 대표했다. 노사 갈등이 정점에 이른 1989년 경제 5단체가 참여하는 경제단체협의회 창설을 주도했고, 1990년에는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여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도 발족시켰다. 1993년 경총 회장으로 한국노총과의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은 1975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을 맡은 후 스포츠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마라톤에 집중 투자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마라톤 기록 경신자에게 연구장려비로 1억원을 내걸어 활력을 불어넣었고, 실제 이를 받은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명예회장은 50년 넘게 신은 가죽 슬리퍼를 비서실이 버리자 호통을 쳐 쓰레기통에서 이를 다시 찾도록 한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해왔다. 10년 넘게 같은 트렌치코트를 입었고, 등산을 갈 때도 국산 9인승 승합차를 애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엔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김영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조화를 보낸 것을 비롯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김윤 삼양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현준 효성 사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이석채 전 KT 회장,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등이 빈소를 찾았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정세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도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코오롱그룹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12일 오전 5시, 장지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금릉공원묘원이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