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페이스북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일못유) 담벼락에 2030세대의 ‘웃기고 슬픈’ 사연이 즐비하다. 회원의 대부분은 20,30대다. 용역계약직 등 말단 사원부터 대학원생, 단체 활동가, 중소기업 관리직 등 각계각층이다. ‘일 잘하는 세상에 일 못하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와 같은 역설적인 이유를 드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위로 받고 싶어서’, ‘내 이야기 같아서’ 등 공감을 나누기 위해 가입한 회원들이다.
모임을 이끄는 이는 성공회대 신학대학원생 여정훈(30)씨다. 여씨는 1년 6개월 동안 기독교 시민사회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왜 나는 일을 못하는가”라는 고민을 수없이 되풀이 했다고 한다. 장고 끝에 여씨는 “나는 조직 내 상하관계, 위계질서 등 수직구조와는 잘 안 맞는 사람이다”란 결론을 내렸다.
대학시절 그는 스펙 쌓기보다 농촌 봉사나 선교활동에 몰입했기 때문에 사회가 원하는 인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졸업 후 들어간 NGO기관에서 기획서 작성, 예산과 결산 처리, 조직 내 매뉴얼 등 사무실 생활 거의 모든 부분에서 ‘부족한’ 자신을 발견한 것. 마침내 여씨는 지난 7월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페이스북에 ‘넋두리’를 올렸다.
#웃기고 슬픈 2030세대 ‘말말말’
그가 날린 ‘송곳’같은 푸념은 결국 대박을 터뜨렸다. 한두 사람의 맞장구가 120여일 만에 2700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모두 “나 정말로 일을 잘 못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배꼽을 잡는 얘기도 많지만 코끝 찡한 사연도 올라온다. 오늘도 일못유 담벼락은 각종 애환으로 열기가 뜨겁다. 팀장의 신용카드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 액세서리를 구입하다가 딱 걸린 직원, 자동차 연료상태 표시를 구분 못한 졸병, 점(.)과 슬래시(/) 붙이지 않고 엔터를 그냥 두드려 서버 하드를 모두 날려버린 전산 담당자 등 각양각색이다.
“저는 작년 겨울에 팀장님 개인 신용카드를 호주머니에 넣은 채 퇴근하고는 그걸 제걸로 착각하고 액세서리 가게에서 제 머플러를 구입했습니다. 팀장님께 곧바로 결제 문자가 갔지 뭡니까.”(A씨)
“군대 있을 때 후임 이야기입니다. 작업장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 써서 연료를 채워놔야 하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연료보급차가 왔기에 그 후임에게 그 장비의 기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하라고 시켰더니 그 후임은 기름이 가득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며칠 뒤 그 장비를 사용하려고 했더니 계기판의 바늘이 F가 아니라 E에 있었습니다. 그 후임을 불러 계기판을 보라고 했더니 바늘이 E에 있어서 가득 찼다고 한건데 왜 그러냐는 반응이더군요. E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enough의 E라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더군요. 그럼 F는 뭐냐고 물었더니 fault인지 fail인지 헷갈리지만 분명 둘 중 하나라더군요. 저는 할말을 잃고 가서 할 일 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로 다시는 그 후임에게 단독으로 일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B씨)
“계란블럭을 넣고♡ 분말스프도 넣고♡ 금방 펄펄 끓인 뜨거운 물 붓고∼♡면이랑 국물이랑 후루룩 후루룩 맛있게 먹고, 건더기 긁어먹으려고 젓가락으로 바닥을 삭삭 긁는데, 응? 뭐지? 고추기름(유성스프)이었어요…”(C씨)
“rm -rf. /이전 회사에서 했던 대형사고…운영 중이던 서버의 접속해서 위와 같은 명령어를 쳐서 서버 하드내용을 깡그리 지워버린 적이 있어요. 점(.)과 슬래시(/)가 붙어있어야 하는데 이게 떨어져 있더라고요. 인식한 시점은 서버가 이미…식은땀이 흘러서 바지까지 젖어있었죠…”(D씨)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일문일답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만난 여씨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자는 취지로 ‘일못유’를 만들었다고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경쟁사회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모임의 철학에 대해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성경에서는 일 못하는 것(사람)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있나.
“성경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각 사람은 독특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상사의 의중을 파악하는 요령, 일을 계획하고 체계적으로 실행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무한경쟁의 시대 하나님의 독특한 피조물인 우리들 모두 행복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유한 성품과 개성들을 더 잘 발전시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능력위주 회사 문화 어떻게 생각하나.
“성경엔 베데스다 연못 이야기가 있다. 베데스다에서 치료받는 사람은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잘 달릴 수 있는 사람,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만 거기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질서를 거부하시고 온 몸이 마비된 환자를 일으키셨다. 먼저 온 일꾼들과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임금을 준 주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얼마나 역설적인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이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용돈이 아니다. 일을 좀 못 한다고 해서 부모가 벌주듯이 쉽게 임금을 깎거나 해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회원 중에 크리스천은 얼마나 되고 일반 회원들과 다른 점은.
“누가 크리스천인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다만 자신이 전도사라거나 신학생이라고 밝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교회 밖에서의 노동과 안에서의 노동이 크게 다르지 않다. 경쟁과 평가가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정신을 반영하는 노동을 할 수 있을지, 교회는 어떻게 스스로의 노동을 복음적인 형태로 구성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나는 믿음의 기업이나 교회가 조금 더 관대하고, 기업에서 발생한 수익을 노동자들에게 더 잘 분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왜 이 모임을 만들었나. 향후 계획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모임이 아니다. 내가 힘들어서 숨 한 번 쉬어 보려고 만들었다. 일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위로를 받고, 일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9일 오후 5시에 서울 강남구 역삼동 공간 대여업체 아이디어팩토리에서 첫 오프라인 모임을 갖는다. 이날 참석하는 회원들은 스트레스를 태우는 밀랍초도 만들고, 애환도 나누고, 최고급 더치커피로 만든 아포가토와 아메리카노도 제공한다. 아울러 ‘일 못하는 라디오’(가명) 팟캐스트에 대해서도 논의할 예정이다. 언제 개국할지 미지수지만 조만간 때가 되면 일 못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사연으로 나누고, 상담도 할 생각이다.
-일 못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무임승차’ 대접을 받는데.
“인간은 언제, 어떻게든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 실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면 좋겠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지구 위에 무상으로 거주한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 우리 중 무임승차자 아닌 사람이 누구인가. 일 못하는 사람 또한 하나님의 귀한 작품이고, 그를 통해 들려주려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만든 여정훈 “일을 좀 못 한다고 임금 깎거나 해고하는 것 하나님 뜻일까요?”
입력 2014-11-08 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