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으리’ NO… ‘공평한 기회’ YES

입력 2014-11-10 02:49 수정 2014-11-10 15:44

"템포가 빨라졌다." "재미있어졌다." 한국축구 국가대표팀이 요즘 팬들에게 많이 듣는 얘기다. 울리 슈틸리케(60·독일) 감독 부임 이후 한국축구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9월 5일 한국축구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된 슈틸리케 감독은 새 얼굴을 발굴하고 한국축구 문화를 익히기 위해 부지런히 축구장을 찾아다녔다. 대표팀 선수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눴고 코칭스태프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지난 10월 10일(파라과이전·한국 2대 0 승)과 14일(코스타리카전·한국 1대 3 패) 치른 두 차례 평가전에선 유연한 전술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물론 외국인 감독이 한 명 왔다고 한국축구 체질이 확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팬들은 슈틸리케 감독의 '열정과 헌신'에서 희망을 봤다.

이제 슈틸리케 감독은 두 번째 시험대에 오른다. 요르단(14일·암만), 이란(18일·테헤란)과 치르는 두 차례의 중동 원정 평가전은 내년 1월 4일부터 26일까지 호주에서 열리는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을 대비한 모의고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중동 원정 평가전을 앞두고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한국축구 문화를 알고 싶다”=슈틸리케 감독은 대표팀의 일곱 번째 외국인 사령탑이다. 앞서 ‘한국호’를 지휘했던 6명의 외국인 감독들 중 거스 히딩크(68·네덜란드)를 제외하면 대부분 쓸쓸하게 짐을 쌌다. 오죽했으면 외신이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을 두고 ‘독이 든 성배’라고 했을까.

독이 든 성배를 기꺼이 받아든 슈틸리케 감독은 가장 먼저 한국축구 문화 순례에 나섰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달 22일 상주 시민운동장을 찾아 상주 상무와 FC 서울의 ‘2014 하나은행 FA컵’ 준결승전을 지켜봤다. 그는 경기 후 “특정 선수를 점검하기 위해 찾은 것은 아니다”며 “한국에서 열리는 경기를 두루 참관하면서 한국축구 문화를 접하고 싶었다”고 참관 목적을 밝혔다.

한국축구 체질을 개선하려면 축구 문화부터 파악해야 한다는 게 슈틸리케 감독의 지론이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9일 “슈틸리케 감독은 바쁜 시간을 쪼개 K리그 클래식(1부 리그)뿐만 아니라 챌린지(2부 리그), 아시안게임, 대한축구협회컵(FA컵), 여자축구, 유소년축구 경기장을 찾았다”며 “한국축구 문화를 빨리 익혀 발전 방향을 찾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선수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겠다”=슈틸리케 감독은 지난달 25일 경기도 안산 와스타디움 관중석에서 코칭스태프와 함께 K리그 챌린지 안산 경찰청과 강원 FC의 경기를 지켜봤다. 축구협회 직원이 슈틸리케 감독에게 안산 경찰청에서 뛰는 이용래를 가리키며 “대표팀에서 한동안 뛰었던 미드필더”라고 친절하게 소개했다. 그러자 슈틸리케 감독은 “내게 아무 얘기도 해 주지 마라. 선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 내가 편견을 가지고 볼 수밖에 없다”고 축구협회 직원의 말을 끊었다. 모든 선수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의 1기 운영 원칙은 확고했다. 편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철학과 전술에 맞는 선수들을 가려내기 위해 멤버 23명을 제로베이스에서 평가하겠다는 것.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의 공식 데뷔전인 파라과이전에서 기존 주력 멤버로 활약한 선수들을 빼고 새 얼굴을 대거 선발로 기용하는 ‘깜짝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어 코스타리카전에서도 다시 라인업에 대폭 손을 댔다. 두 경기 연속 선발 출장한 선수는 남태희(23·레퀴야)와 이청용(26·볼턴), 기성용(25·스완지시티)뿐이었다.

◇“융통성 있는 전술로 승부 건다”=슈틸리케 감독이 보여 준 독특한 전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시스템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실점을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인 공격 축구를 추구한다. 그가 선보인 포메이션은 공격 땐 4-2-3-1, 수비 땐 4-2-4 형태였다. 선수들은 공격 땐 유기적인 움직임과 빠른 패스 플레이로 상대 골문을 위협했고, 수비 땐 4명의 포백이 공을 가진 상대 공격수를 강하게 압박했다.

홍명보 전 감독이 브라질월드컵에서 단조로운 전술 패턴으로 고전한 반면 슈틸리케 감독은 두 차례 평가전에서 공격 옵션들의 스위칭과 제로톱, 과감한 패스 등 특정 전술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현대축구에서는 한 가지 스타일만 고집해선 이기기 어렵다”며 “슈틸리케 감독이 지난 두 차례 평가전에서 보여 준 전술적 다양성과 융통성은 훌륭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아직 불안한 수비 조직력은 더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슈틸리케호’는 코스타리카전에서 수비에서 허점을 보이며 3골이나 허용했다. 코스타리카처럼 빠르고 개인기가 좋은 팀을 만났을 때 수비는 흔들렸다.

◇“유·청소년 축구 투자가 한국축구의 미래”=슈틸리케 감독은 히딩크나 딕 아드보카트(67·네덜란드) 전 대표팀 감독에 비하면 유명세가 떨어진다. 스위스 대표팀 감독(1989∼1991), 독일 대표팀 수석코치(1998∼2000), 독일 연령별 대표팀 감독(2000∼2006), 코트디부아르 대표팀 감독(2006∼2008) 그리고 카타르 클럽들(2008∼2014)을 맡은 게 전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독일 연령별 대표팀 감독 경력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독일 축구의 체질을 개선한 주역이다. 독일축구는 2000년 유럽축구대회에서 조별리그 무승으로 탈락했다. 충격은 받은 독일축구협회는 2006 독일월드컵에 대비해 유망주 육성 프로그램인 ‘팀 2006’을 가동했다. 첫 사령탑이 바로 슈틸리케였다. 독일축구는 ‘팀 2006’ 덕분에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정상에 올랐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1일 인천국제공항 인재개발원 축구장에서 열린 아마추어 유소년클럽 왕중왕전인 ‘2014 인천국제공항 유·청소년 클럽 챔피언십’ 개막식에 참석해 “유·청소년 축구에 대한 투자는 결국 대표팀의 근간이 되는 프로축구 선수들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것”이라며 “축구에선 프로-아마추어-유·청소년 축구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축구는 슈틸리케 감독으로부터 대표팀 전력 향상뿐만 아니라 유·청소년 축구 발전을 위한 노하우도 얻어내야 한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