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체험, 하나님을 뜨겁게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 세상은 온통 다른 색깔로 보였다. 그동안 초등학교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으나 형식적이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것이 부끄러웠다. 학생회장도 했고 주일학교 교사도 했지만 나는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다. 나는 남들처럼 기도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 앞에서 요란하게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며 하나님을 만났는데 이것도 유전인가 하는 것이다. 부친이 예수님을 만난 날짜가 1950년 6월 11일이다. 부친도 기도하다 새벽 4시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회개를 하셨다. 그때 같이 있었던 분들의 말을 빌리면 뜨겁게 회개하던 모습이 마치 제 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고 한다. 성령에 온전히 취하면 이성적인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회개는 목사가 된 나의 장남(이대연 목사)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면서 회개한 것으로 또 이어졌으니 회개도 기질과 관계있는 것인지, 유전되는 것인지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신학대학원 기숙사에서 지내며 거의 굶다시피 보낸 1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이때가 내 삶에 있어 가장 경건하고 은혜로웠던 시기였다. 육의 만족은 영성을 키우지 못한다. 철저한 자기부인과 내려놓음, 절제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기숙사 방을 같이 쓰던 친구(최치규)는 결혼하고 딸도 있는데 뒤늦게 사명을 받아 신학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먹을 것이 생기면 챙겼다가 꼭 나눠 먹곤 했다. 1학년 평균성적이 90점이 넘었던 나는 OMS선교회 장학금 수혜자가 되어 학비에 기숙사 식비까지 제공받아 지긋지긋했던 배고픔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따라서 남은 대학원 2년은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친구와 나는 서로 이렇게 약속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의 종으로 부르신 것에 감사하자. 그래서 그 어떤 곳에서 우리를 부르더라도 가리지 말고 가자. 설사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는 오지 산골짜기라도 말이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1960년대에는 목회자에 대한 인기가 바닥이었다. 목사 사모가 된다는 것은 고난을 각오해야 했기에 아주 믿음이 좋지 않고선 신학생과의 만남을 꺼렸다. 나도 나이가 차 이제 목회지로 나가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결혼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면 아무도 안 가는 산간벽지라도 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 악조건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돈 없고 힘없는 가난한 유학생과 결혼해 전기도 수도도 없는 산골에 가서 내조해 줄 사모감은 없을 것 같았다.
이때 난 신앙이 한창 불붙어 있었다. 내 만족을 위해 연애하고 놀러 다니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끼고 있던 터라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아주 단순했다.
“하나님. 제게 짝을 주시면 하나님이 맺어주신 배필이라 믿고 결혼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던 후배 신학생이 내게 신붓감을 소개해 주었다. 박정자란 이름을 가진 신앙심 깊은 여성이었는데 나를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몇 번의 데이트 후 우린 결혼을 약속하고 1966년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가난한 신혼생활이 시작됐다. 이후 어려운 목회자의 생활에서 기도와 믿음으로 자녀를 교육하고 가정을 잘 이끌어준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을 갖고 있다.
주님이 명령하는 사역지는 어디든 가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던 중 첫 번째 임지가 결정됐다. 그곳은 오지가 아닌 서울의 가장 중심인 청와대 옆 체부동성결교회였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용원 (4) 아들에게도 유전처럼 전해진 ‘고백 후 중생 체험’
입력 2014-11-10 0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