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권기석] 디지털 키즈의 고백

입력 2014-11-08 02:59
기계를 좋아했다. 1994년 155만원을 들여 산 첫 컴퓨터가 ‘기계질’의 시작이었다. “여기엔 그래픽카드 램이 2MB나 들어가요.”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조립 컴퓨터를 권하던 아저씨의 말은 한 가닥 의심과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 뒤부터 직접 컴퓨터를 조립했다. 사 온 부품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뜯고 나사를 돌리고 끼워 맞췄다. 조립할 줄 아는 지인을 집에 불러 강의도 받았다. 전원 버튼을 눌러 모니터에 정상적으로 불이 들어올 때의 감격은 매번 새로웠다.

수동 카메라도 신기한 기계였다. 당대의 명기라던 니콘 FM2와 미놀타 X700으로 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었다. ‘암백’에 양손을 넣어 감각만으로 빈 필름 통에 새 필름을 끼우는 일은 며칠간 연습이 필요했다. 렌즈를 갈아 끼울 때마다 뷰파인더 속 세상의 크기도 달라졌다. 모터 드라이버를 달았더니 총을 쏘는 것처럼 자동 연사가 됐다. 몇 년 뒤 DSLR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암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기다리지 않아도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아이폰처럼 생겼지만 전화기능이 없는 ‘아이팟 터치’를, 아이폰이 국내에 수입되기 전 구입했다. 지금처럼 와이파이가 흔하지 않던 시절 그걸 들고 어쩌다가 인터넷으로 뉴스 속보를 본 적이 있다. “역시 이걸 쓰기 잘했어. 남들은 모르겠지.” 만족감이 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왜 그토록 기계에 집착했을까. 첫째 이유는 ‘겉멋’이다. 컴퓨터나 노트북, 카메라, 스마트폰 등은 매번 신제품이 나오는 기계다. 이것들을 익숙하게 잘 다루면 시대를 앞서간다고 생각했다.

기계가 주는 즉각적 반응도 매력적이었다. 제품화된 기계는 결코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명령을 내리면 곧바로 순응한다. 친한 친구도 가끔 거짓말을 하는 마당에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기계가 믿음직스러웠다. 업체들이 신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추가하는 신 기능은 모두 현실세계에 곧바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들이 삶을 더 편하게 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몹시 빠른 속도로 기계의 디지털화가 이뤄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능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 “당신은 기계로 편해졌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정보를 얻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다. 버스가 언제 올지 알 수 있고 길을 찾을 때 최단 거리를 미리 파악할 수 있다. 메시지 앱은 즉각적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동시에 귀찮은 일도 생겼다. 메시지 앱에서 알림 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봐야 한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나서는 흔들리거나 구도가 이상한 사진을 일일이 지워야 한다. 파일이 혹시 지워질까봐 이곳저곳에 나눠 저장도 한다. 예전엔 인화해온 사진을 그냥 앨범에 꽂으면 그만이었는데 말이다. 컴퓨터를 바꿀 때마다 소프트웨어나 공인인증서를 새로 설치하는 일도 지겹다. 조금이라도 복잡한 새 기계를 익히려면 매뉴얼을 정독해야 하는 등 투자하는 시간도 늘어난다. 내가 원했던 편리함은 이런 게 아니었다.

점점 ‘겉멋’ 부리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디지털 기계의 대중화로 기계를 사랑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남과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법은 조금이라도 값비싼 최신식 기계를 사는 것이다. 척박한 수입 조건을 지닌 신문기자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최근 고심 끝에 기계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결단코 더 이상 기계에 애정을 쏟지 않고 철저하게 ‘이용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정말 필요하지 않으면 새 기계는 구입하지 않을 생각이다. 새로 나온 아이폰6에도 일부러 관심을 끄고 있다. 처음보다 느려졌지만 지금 쓰는 국산 안드로이드폰도 아직은 쓸 만하다. 몇 달 전엔 DSLR에서 파일의 설정을 용량이 큰 RAW에서 용량이 작은 JPG로 바꿨다. 한번 찍은 사진을 보정하느라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컴퓨터는 조립하지 않고 만들어진 노트북을 사용한다.

기계를 만지작거리는 시간도 줄이려고 굳세게 다짐하고 있다. 메모리를 늘리거나 그래픽카드를 교체하기 위해 컴퓨터를 뜯었다 닫았다 한 시간이 돌이켜보면 좀 아깝다. 각종 사용기·후기 검색에도 그간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쓴 것 같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었다면 삶이 더 깊고 풍성해졌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작은 소망 하나를 이루고 오랜 기계질을 끝내려 한다. 수년 전 ‘와이프 억셉턴스 팩터’(Wife Acceptance Factor·오디오 등 기계가 실내 인테리어와 잘 어울려 아내의 동의를 얻기 쉽다는 뜻)를 갖췄다는 선전에 현혹돼 산 스피커가 있다. 아내는 오디오 자체에 무관심하고, 지난 주말 들었을 때 소리가 별로였다. 요놈만 바꾸면 진짜 끝(?)이다.

권기석 사회부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