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모잠비크 발라마에서의 일이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자지도 못했다. 때문에 마을 입성 기념으로 한 아이로부터 삶은 계란 두 개와 콜라를 구입했다. 아무데나 철퍼덕 주저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배를 채웠다. 잠시 후 하루에 몇 대 없다는 펨바로 가는 시외버스가 정류소에 들어섰다. 이내 혼잣말로 되뇌었다.
“저 차를 타고 펨바 가면 얼마나 좋아? 5시간이면 갈 거리를 자전거로 5일 걸려서 가야 하잖아. 에휴∼.” 버스에 탄 승객들이 살짝 부러웠다. 버스 차창을 사이에 두고선 상인들과 손님들의 거래가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머리에 각종 음식을 가득 인 아낙네들은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애타게 손님들의 시선을 끌었다. 느긋한 손님들은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음식들을 구입하기 위해 팔을 뻗어 건네주는 음식들을 받아갔다. 대개는 볶음밥과 생선튀김, 삶은 계란, 물 등 단출한 메뉴들이었다. 그때 당혹스러운 순간을 목격했다.
갑자기 시동을 건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단이 일어났다. 영문을 모르는 상인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가 당황한 나머지 맹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떤 아낙네는 신발도 없었다. 그녀들은 쇳소리 나는 거친 고함을 질렀고, 그 소리는 처절하게 들려왔다. 울먹이는 건지, 화나 있는 건지 몹시 애타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쩌면 그 푼돈이 아이의 교육비나 노모의 약값, 그날 그 가족의 한 끼 식사로 쓰이기 위해 꼭 필요한 금액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버스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태를 주시하는 내게 엄마들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계란 까먹는 것도 까먹었다. 왜인지 버스는 무심히 떠나버렸고, 미처 버스를 쫓아가지 못한 나이 든 아낙네들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앞세운 여인들은 기어코 버스를 세우고야 말았다. 초반 속력에 비해 버스가 다행히 멀리 가진 않았던 것이다. 그제야 남아 있던 상인들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나 역시 마음을 놓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낙네들이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도리어 승객들에게 돈을 건네고 있는 게 아닌가. 뒤이어 따라온 여인들도 창을 통해 잔돈을 거슬러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버스를 불러 세운 것이, 맨발로 달리면서까지 버스를 쫓아간 것이 물건 값을 받기 위함이 아닌 거스름돈을 주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마지막까지 계산을 마치고 삼삼오오 정류소로 돌아오던 아낙네들의 표정에는 환한 꽃이 피어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깔깔깔’ 웃는 걸까? “글쎄 버스 놓쳤으면 하마터면 거스름 돈 못 줄 뻔했다니깐! 승객이 얼마나 속상했겠어?”라는 말들을 하고 있는 걸까. 구태여 버스를 세우기 위해 달려간 저 맨발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장면을 보고선 가슴에 가벼운 통증이 일었다. 순박함의 극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기가 바로 아프리카란 말인가. 하찮은 이익에도 탐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 앞에서 너무도 쉽게 양심을 저버리는 나의 부끄러움은 도대체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정직하라 하셨다. 나의 가슴을 치며 너희에게 이르노니, 정직하라 하셨다. 현대 사회에선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가슴 아픈 말들이 복음의 진리를 가리고 있다. 예수님에 대해, 천국 복음에 대해, 그분의 사랑에 대해 정직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인생이요, 사명이다. 아프리카에서 우연히 목격한 이 장면 역시 하나님의 섬세하신 인도하심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를 무릎 꿇고 소망한다.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음을 또한 회개한다. 정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인생이 복이 있다. 그 복은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정직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태도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니까.
문종성(작가·vision-mate@hanmail.net)
[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30) 정직하라-모잠비크 발라마 버스 정류장에서
입력 2014-11-08 0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