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연필이 두 개로 보여.”
아이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아이에게 흔히 일어나는 잠깐의 스트레스일 거라고, 병원에 가면 금방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가속도가 붙어 악화됐다. 석 달 전만 해도 평범했던 다섯 식구는 지금 긴장과 불안, 슬픔과 막연한 희망이 뒤섞인 나날을 힘겹게 헤쳐가고 있다.
6일 서울의 한 종합병원 어린이병동. 7인실 한쪽 구석에 의식 없는 아이가 누워 있다. 얼마 전까지 대금을 불고 해금을 켜던 국립국악중학교 3학년 박채원(15)양. 고열에 시달리는데 해열제를 쓸 수가 없다. 어머니 유정애(43)씨는 열이 오른 갓난아기에게 하듯 얼음과 찬 수건으로 몸을 닦아냈다. 춥다고도, 아프다고도 말할 수 없는 채원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채원아, 엄마가 열 내려줄게. 괜찮아 채원아.”
채원이가 완전히 의식을 잃은 건 2개월 전이다. 시작은 ‘복시(複視)현상’이었다. 8월 초 갑자기 모든 게 겹쳐 보여 동네 안과를 찾았다. 눈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뇌 검사를 권했다. 서울의 종합병원을 예약하려고 보니 2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동네 검진센터에서 MRI 검사를 했다. “이상 없습니다.” 채원이네는 안심했다.
안도의 시간은 얼마 못 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온갖 증상이 튀어나왔다. 한쪽 팔·다리에 힘이 풀렸다. 몇 걸음만 떼도 넘어졌다. 아무 이유 없이 눈꺼풀이 감겼다. 힘겹게 악기를 연주해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귓속을 울리는 것은 어렴풋한 자기 목소리뿐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통제가 안 됐다. 채원이와 가족은 겁에 질렸다.
8월 14일, 지금 입원 중인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이틀 동안 응급실을 떠나지 못했다. 검사에 검사가 이어졌다. ‘다발성경화증’이란 희귀난치성 질환이라고 했다. 첫 번째 진단명이다. 사흘간 스테로이드제 치료를 받았는데 더 나빠졌다. 유씨는 불안했다. 하루 이틀이라도 더 봐주면 안 되겠느냐고 매달렸지만 병원에서는 ‘약을 먹고 안정을 취하면 나아질 것’이라며 돌려보냈다. 유씨가 가장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다. 그는 “어떻게든 더 매달렸어야 했다. 어떻게든 (병원에서) 더 봐줬어야 했다”고 가슴을 쳤다.
집으로 돌아온 채원이는 하루하루 급속도로 병을 키웠다. “엄마, 나 언제 괜찮아져?” 어렵게 입을 뗀 채원이의 질문에 유씨는 “약 잘 먹으면 괜찮아진대”라고 답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눈도 못 뜨고 누운 채 허공에 대고 해금 켜는 동작을 했다. 며칠 더 지나니 그마저도 못했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약 먹으면 나을 거라는 말만 믿다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생각에 퇴원 1주일 만에 국립암센터 응급실을 찾았다.
채원이의 병명 찾기가 시작됐다. “혼수상태네요. 왜 이제 오셨나요?” “약 먹으면 괜찮아진다고 해서요. 다발성경화증이라던데요?” “아닌 것 같습니다. 약이 전혀 안 듣네요. 검사부터 해보시죠.”
수십 가지 검사가 이어졌다. 두 번째 병명은 ‘탈수초질환’. 또 희귀병이다. 치료를 했는데 차도가 없었다. 의료진은 어린이 희귀병 전문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 갔던 그 병원이었다.
이번엔 어린이병동 응급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세 번째 진단명은 ‘시신경척수염’이었다. 이번에도 희귀병이고, 이번에도 약이 안 들었다. 몇 차례 더 검사하더니 시신경척수염도 아니라고 했다. 온갖 검사에 독한 약물을 써댔지만 채원이는 치료 3주 만에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얻은 병명은 ‘병명 없음’이다. 병명을 모르니 치료법도 없다. 채원이네는 끝 모를 터널로 들어섰다.
채원이의 하루
오전 6시 아침 식사를 한다. 식도에 연결된 콧줄로 미음을 먹는다. 오전 약이 들어간다. 콧줄로 점심을 먹고, 약을 몇 개 더 먹고, 호흡기 치료를 한다. 오후 6시 저녁 식사도 같은 식이다. 틈날 때마다 운동을 하고 수시로 가래를 빼낸다. 단조롭다. 그러나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매 순간이 전쟁이다.
가느다란 콧줄로 천천히 미음을 넣어야 하는데 이건 보호자인 유씨가 해야 한다. 채원이의 운동은 체위를 바꾸는 정도면 충분하지만 이마저도 간단치 않다. 38㎏이 맞나 싶을 만큼 무겁다. 다리만 들어도 몸무게 70㎏의 장정을 옮기는 것 같다. 욕창이 안 생기게 하려면 수시로 몸을 움직여줘야 한다. 기계를 이용해 가래를 빼주는 것도, 열이 나면 계속 몸을 닦아주는 것도, 매일 20번 넘게 배변 주머니를 갈아주는 것도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채원이는 중환자실에 열흘 있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숨을 이어갔다. 열흘 만에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의식이 없는데도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그러고 유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간호사들에게 ‘간병하는 법’을 배운 거였다. 유씨는 “곧 숨넘어갈 듯 할딱이던 채원이 호흡이 아직도 생생하고, 그 생각을 하면 무섭다”고 말했다.
의식이 없으면 평온한 상태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아이 몸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 면역력이 너무 떨어져 온갖 합병증이 괴롭힌다. 독한 약에 위장이 온통 헐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위세척을 해야 한다. 열이 오르고 간수치가 떨어진다. 언제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언제 다시 괜찮아질지도, 언제 이 모든 게 끝날지도 알 수 없다.
의식 없는 아이가 셋 있었습니다
채원이가 입원한 병원에는 의식 없는 아이가 3명 있었다. 희귀병 환자인 세 아이는 얼마 전부터 병원을 나가 달라는 종용을 받았다. 더 이상 해줄 게 없으니 치료가 급한 다른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 달라는 거다. 한 아이는 병원을 옮겼고, 채원이를 포함해 두 아이는 못 나가고 있다. 받아주겠다는 다른 병원이 없어서다. 유씨는 얼마 전 수도권 종합병원 8곳을 알아봤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해줄 게 없고 부담스럽다는 게 이유였다.
채원이와 함께 남은 아이는 건강한 뇌가 1%밖에 안 된다고 한다. 매일 지독한 고통에 경기를 해댄다. “하루는 그 아이 엄마가 날 붙잡고 대성통곡하더라고요. 고통스러워서 몸이 저절로 떨리고, 소리치는 아이를 꼼짝없이 지켜보는 게 너무나 힘들다고, 그래서 차라리 고통을 끝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무척 괴로워했어요. 그런 부모에게 ‘나가 달라’는 말이 얼마나 야속한지 몰라요.”
두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돌봐줄 병원을 찾아 백방으로 뛰고 있다. 아픈 자식 걱정으로도 버거운데 세상은 희귀병 환자 가족을 이렇게 몰아붙인다. “당장 채원이가 갈 수 있는 데는 작은 요양병원 정도겠죠. 지금처럼 열이 나면 종합병원에서는 피검사로 왜 열이 나는지 알 수 있고 대처할 수 있는데 요양병원에서도 그게 가능할까요. 병원에선 그냥 집으로 가래요. 병원은 포기할지 몰라도 부모는 안 돼요. 정말이지, 자식은 포기가 안 돼요.”
채원이네 다섯 식구는 지금…
채원이가 아프면서 다섯 식구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저소득층으로 내려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3개월 동안 들어간 병원비가 3000만원이 넘었다. 하루하루 내야 할 돈이 쌓인다.
먼저 자동차부터 팔아 당장 필요한 현금을 해결했다. 밀린 병원비를 내기 위해 집을 내놨다. 빚을 갚고, 병원비를 내고 나면 월세 보증금 정도 남는다. 유씨는 채원이 곁을 지켜야 하고, 채원이의 두 동생은 허리가 아파 제대로 걷기도 힘든 할머니가 돌본다. 써야 할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점점 더 가진 게 없어진다.
정부는 희귀병 환자에게 진료비의 10%만 받는 건강보험 산정특례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병명이 없는 채원이는 특례 적용을 받지 못한다. 당연히 저소득 희귀병 환자에게 지원되는 의료비 지원도 못 받고 있다.
난치병 환우회나 희귀질환자 지원 단체도 알아봤지만 병명이 없다는 게 언제나 걸림돌이었다. 병명을 못 찾을 만큼 희귀한 질병을 가진 환자들은 오히려 모든 지원에서 밀려나고 있다. 유씨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월세 보증금도 다 까먹고 여기저기 빚내서 살아야 하는 건가 봅니다. 혹시 완전히 무너지고 나면 누군가 도와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라고 말했다.
채원이는 국악 지도자가 꿈이었다. 차근차근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멈춰 섰다. 그래도 유씨는 채원이를 보며 매일 희망을 속삭인다. “채원아, 우린 지금 절망과 희망의 한가운데 서 있어. 절망은 보지 말고 희망만 보면서 같이 가자. 엄마는 네가 반드시 다시 눈을 뜨고, 엄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을 살아갈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는 네 꿈을 이룰 거라고 믿어.”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기획-희귀병 질환자의 고통] ‘병명 없음’ 채원이도, 가족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입력 2014-11-07 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