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 난 신학대학은 일반대학에 가기에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장충동의 한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한 후 내가 신학대학원을 가야겠다고 갑자기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중앙대학교 졸업식날과 서울신학대학원 입학시험 날짜가 같았다. 졸업식을 포기하고 신학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렀고 합격증을 받았다. 대학생활을 할 때 학비는 대전에 계신 부친이 보내주셨지만 생활비는 가정교사를 하며 벌어 썼던 나였다.
이제 아들이 졸업을 해 돈을 벌어 학비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할 부친에게 다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신앙이 돈독하신 부친이시니 내가 주의 종의 길을 간다고 말씀드리면 기뻐하실 것도 같았다.
대전집을 찾아 과정을 상세히 말씀 드렸는데 반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야, 이놈아. 신학대학은 아무나 가는 곳이 줄 아느냐. 고작 하루 기도하고 일시적인 감정으로 가는 곳이 아니야. 그렇다면 아직도 안 늦었으니 당장 그만둬.”
난 내 행동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던 차에 부친의 말은 큰 충격이 되었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등록금을 받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내가 소중히 갖고 있던 손목시계를 비롯해 이것저것 모두 팔고 남아 있던 생활비까지 털어 간신히 등록을 마쳤다. 대학원 강의를 듣기 시작하는데 교과서를 살 돈도, 밥을 사먹을 돈도 없었다. 당시 신대원은 현재 아현성결교회 자리에 있었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면 슬쩍 밖으로 걸어나와 아현동 일대를 배회하다 들어가곤 했다. ‘금식’이 아닌 ‘굶식’이었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배가 너무 고파 잠이 오지 않았다. 취직이나 할 것을 괜히 신학대학원에 온 것이 아닌가 후회도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학기 초마다 부흥회를 여는데 공군 군종감이셨던 임동선 목사님이 강사로 오셨다. 마지막 날 금요일은 철야기도회로 모두 뜨겁게 기도했다. 동료 신학생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성령 충만하게 기도하는데 나는 냉랭했다. 왜 친구들과 달리 조금만 기도하고 나면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는지 나도 답답했다. 내가 아버지 말대로 사명을 받지 못한 채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새벽 4시가 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내가 그 자리에서 구두를 벗고 양말도 벗었다. 그리고 설교자가 있는 강단으로 뛰어갔다. 강사는 웬 학생이 맨발로 자기를 향해 뛰어오니 정신이 이상한 학생이 온 것으로 판단하고 옆에 있던 한 교수에게 나를 진정시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교수는 내 머리를 내리 누르며 “학생 정신 차려 왜 이래. 여기 나오면 안되지”라고 했다. 이에 “저는 정신이 말짱합니다. 회개하려고 이곳에 나왔습니다. 제게 회개할 시간을 주세요. 시간을 안 주시면 전 학교를 그만두겠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교수는 할 수 없이 나의 뜻을 강사에게 전했고 난 10분간이란 단서 하에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전 교수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공개회개의 봇물을 터뜨렸다. 숨길게 없었다. 아니 이것은 성령이 시키는 회개였다. 나도 모르게 내 죄의 고백과 회개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갔고 난 시간이 얼마나 지나는지도 몰랐다. 마이크를 돌려받은 강사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왔다.
“신학생이면 이 정도 회개는 미리 하고 들어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하고 정직해서 좋았습니다. 아직도 이런 회개를 하지 않은 분 있으면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거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무릎 꿇고 통곡하는 회개운동이 예배당 안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 나는 이날에서야 비로소 중생의 체험, 본 어게인(Born Again)을 한 것이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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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11-07 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