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원 인터’의 장그래·오 과장 현실엔 없는 또 다른 판타지

입력 2014-11-06 03:35

[친절한 쿡기자] “너희 애가 문서에 풀 묻혀서 흘리는 바람에 우리 애만 혼났잖아!”

케이블 채널 tvN의 주말극 ‘미생’ 속 대사입니다. 일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고졸 낙하산 신입 인턴 장그래(임시완 분)를 ‘우리 애’라며 감싸는 오 과장(이성민)의 이 대사는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며 미생 열풍에 불을 질렀습니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과 거기에서 비롯된 애환을 그린 드라마는 이제 6화가 막 방영됐지만 연일 호평을 받으며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임시완(25) 이성민(46) 변요한(28) 등 주연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에 힘입어 원작 만화는 100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죠. 드라마의 주 시청자인 직장인들은 미생이 방영되는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브라운관과 ‘폭풍 공감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생 때문에 또 다른 직장인 애환이 생겼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하고 재미있습니다. 미생의 시청자에는 주인공인 장그래와 비슷한 20, 30대 뿐 아니라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경험한 40, 50대도 있기 때문이죠.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착합니다. 고교만 졸업해 학력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업무를 배우고 노력하는 장그래. 매번 툴툴대지만 사실은 속이 깊은 김 대리. 업무의 최전선에서 부하직원들을 독려하며 야근도 불사하는 오 과장 등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이 생기는 겁니다.

주말에 미생을 보고 월요일에 출근한 현실의 오 과장들은 현실의 장그래들에게 “장그래처럼 좀 해 봐라”라고 한답니다. “상사가 자꾸 장그래처럼만 일하라고 회식에서 잔소리 한다” “대체 어느 기업에서 인턴에게 프리젠테이션 기회를 주는지 모르겠다. 기회가 있어야 장그래처럼 일하던가 하지” “자기는 오 과장처럼 못 하면서 왜 나에게 장그래이길 바라는지 모르겠다”라는 불만이 SNS에 속출하고 있죠. 드라마의 이상형을 현실에서 강요하지 말아 달라는 아랫사람들의 하소연이 재미있지만 슬프기도 합니다.

정작 미생을 연출하는 김원석 감독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5일 서울 중구 한강대로 서울스퀘어에서 촬영 중이던 김 감독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직장 상사들도 이미 장그래 시절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훨씬 나은 결과를 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후배와 부하 직원들에게 표출된다는 것이죠. 다만 방식이 서툴러 반감을 살 수 있지만 후배들의 노력을 몰라주는 것은 아니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랜만에 볼 만한 드라마가 나오니 이런 이야기도 나오네요. 서로에게 장그래, 김 대리, 오 과장이 되도록 노력하면 우리 직장에도 ‘애(哀)’ 보다 ‘환(歡)’이 점점 많아지지 않을까요.

이은지 기자 rickonb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