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젊은이, 자네도 늙을 걸세

입력 2014-11-06 02:31

“지금도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거울에 비친 내 모양새가/ 초라하고 불쌍하다/ 생기 없는 얼굴/…/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탓하겠는가/ 무상(無常)한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젠 어디를 가나 늙은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나 어린 사람들이 상대해 주지 않는다/ 병원에 가도 으레 노인은 그런 정도 아픈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늙은 할아버지/ 인간사회에서 조금씩 소외되고 떨어져 나가고 있다/ 고함이라도 쳐서 저항하고 싶다.”

“하루 종일 이 큰 집에 우리 두 사람만 있다/ 대화의 대상도, 싸우고 울고 웃을 수 있는 대상도/ 아픈 아내밖에 없다/ 전화벨 소리도 울리지 않는다/ 서산에 저물어가는/ 늙은이의 하루가 가고 있다/ 하루 종일 견디기 힘든 시간이 그렇게 가고 있다.”

철저히 소외된 노인들의 고독감

문득 지난해 9월 국민일보에 소개된 조옥현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그가 쓴 시집을 다시 꺼내봤다. ‘나이 들면 추억하는 것은 모두 슬프다’. 시집 제목이다. 다이어리에 써온 한 맺힌 시를 모아 미수(米壽)에 시집을 펴냈다. 은퇴 후 25년여 동안 사회에서 고립된 노인의 처절한 심정, 종묘공원이나 집 근처 시장 외에는 갈 곳이 없는 고독이 절절이 묻어난다. 가슴이 먹먹하다. 어제 할아버지 댁에 전화를 해봤다. 내년이면 아흔인데 건강하시고, 잠시 시내에 나가셨다고 했다. 따님인 듯한 분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건강하시다니 다행이다. 그에겐 넉넉한 집과 어느 정도 재산도 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나를 지탱해줄 힘,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면서. 물질이 넉넉한 할아버지도 고립감에 치를 떠는데 돈도 가족도 없는 노인들의 절망감은 어느 정도일까.

며칠 전 ‘국밥 할아버지’ 최모(68)씨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손이었다. 집까지 비워주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최씨는 더 버틸 힘이 없어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다.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십시오. 개의치 마시고.” 그가 남긴 쪽지와 10여만원의 현금은 자신이 남을 배려할 최후 수단이자 세상을 향한 조롱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곁에 말을 들어줄 친구나 가족이 있었다면, 누군가 그에게 눈길 한번 줬더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말만 앞세우는 정치권의 노인정책

지난 3월에도 생활고와 지병에 시달리던 정모(67)씨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정씨 머리맡에는 ‘주인 아저씨 고마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밀린 월세 100만원과 자신의 화장 비용 100만원을 넣은 봉투가 발견됐다. 지독한 외로움과 냉대, 병마를 끊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고 절망할 때 그들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노인 자살, 일가족 자살이 잇따르자 정치권은 또 틀에 박힌 뒷북이다. 이젠 식상하다. 잠시 떠들썩하다 다시 잊혀지기를 반복하는 게 노인 대책, 서민 대책이 아니었던가. 박근혜 대통령도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겠다’고 장담했지만 진정한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 3월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일어난 뒤 한목소리로 추진됐던 ‘세모녀법’은 여전히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고령사회’란 화두가 나온 지도 아마 족히 20년은 된 것 같다. 그러나 그동안 노인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나. 정부에 돈이 없기도 하겠지만 진짜 이유는 그들의 처지를 ‘나의 미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감각 탓이 아닐까. 나도 곧 고독한 노인이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지 않고선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올 수 없다. 노인 대책은 이미 충분히 논의됐고 선진국 모범 사례도 수두룩하다. 실천만 하면 되는데 ‘노인이 다 그렇지 뭐’라고 애써 방치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힘 있는 정치인의 쪽지 한 장에 예산 몇 백억원이 오고가는데 힘없는 서민과 노인들은 죽음으로 호소해도 안 되는 게 우리 사회 메커니즘인가. 지금도 서울에서 매일 200명씩 노인 대열에 합류한다. 우리도 머지않아 노인이 된다. 조 할아버지의 시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인정머리 없는 젊은이, 자네도 곧 늙을걸세.’

노석철 사회2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