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일제 강점기 가난을 피해 한국인들이 이주했던 만주 호림(虎林)이란 곳이다. 부친(이봉주)은 어린 나이에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결혼하고 선진문물을 체험한 뒤 한국에 돌아와 만주 목단강의 철도국 직원으로 근무했다. 일본 회사 직원으로 파견나와 나를 낳은 것이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했던 부친은 이 때문에 광복 후 호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보통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는데 우리가 살던 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부친은 일본사람으로 오인돼 바로 러시아군에게 체포됐다가 조선인인 것을 증명하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몸을 많이 상한 부친은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가족과 두만강을 건넜다.
만주에서 부친의 고향인 충남 공주까지 무작정 걷고 걸어야 했던 우리 가족은 무려 58일 만에 고향에 도착했다. 당시 만주에서는 횡행하는 마적단에 몸을 숨겨야 했고, 한국에 와서는 기진해진 가족들이 쉬다 걷다를 반복하다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오는 내내 추위 때문에 고생했던 나는 공주에 와 폐렴에 걸려 생사를 오가기도 했다. 간신히 생명을 건진 나는 공주초등공민학교 1학년에 들어가 자동차도 기차도 본 적 없는 친구들에게 만주에서 고향까지 걸어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친구들은 귀를 쫑긋 세워 듣곤 했다. 내 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5학년 때 6·25가 일어난 것이다.
전쟁의 고생이야 당시 모두가 겪은 아픔이기에 그냥 넘어가고자 한다. 계속적인 세파를 겪은 아버님은 신문물을 경험한 영향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후일 장로가 되셨다. 이것은 우리 집안의 놀라운 변화였다. 따라서 우리 가족은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내게 미션스쿨을 가도록 권유하셔서 중고등학교를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부친은 내게 기독교 신앙에 눈뜨게 해주셨다. 또 아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쌓으셨기에 오늘 내가 이만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감사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서울로 올라와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당시는 사법고시 패스가 인생 최고의 성공으로 귀결되던 때였다. 그러나 법을 공부하다 보니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신 도산 안창호 선생, 함석헌 선생 등의 생각과 글에 매료돼 문학과 심리학, 인문학에 더 관심을 쏟았다.
대학 3학년 때인 1960년 4·19가 일어났고 애국사상에 심취돼 있던 나는 친구들과 머리띠를 두르고 데모 현장에 나가 중앙청과 경무대를 향해 뛰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어진 5·16군사정변을 보며 군 입대를 했고 모진 고생을 하며 3년 군생활을 마쳤다.
4학년에 복학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법고시는 보기 싫었고 내가 어떤 직업을 갖고 평생 살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생각을 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졸업을 앞둔 2월의 어느 추운 날, 전차를 타고 을지로6가에서 내려 장충단공원을 향해 올라가는데 갑자기 “이용원. 난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넌 뺀질거리기만 하느냐?”는 생각인지 음성인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 음성은 없어지지 않고 자꾸 나를 따라다녔고 나는 어느 작은 교회에 들어가 난생 처음 철야기도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오버코트를 입었지만 교회 안은 추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내 몸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기도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 들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 내 몸을 포근히 감싸안아 주는 느낌 가운데 밤이 훌쩍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은 주일이었다. 교회에서 밤을 새운 내게 정동철 목사님(당시 서울신대 교수)이 ‘서울신학대학 학보’를 내밀며 보라고 주셨다. 이날 설교자로 초빙된 정 목사님은 아무런 생각 없이 내게 주신 신문이었는데 이곳에 ‘서울신학대학원 입학요강’이 실려 있었다. 난 조용히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이거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용원 (2) 광복 맞아 만주에서 충남 공주까지 ‘엑소더스’
입력 2014-11-06 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