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국가의 계획이 일관된 이념과 정책체계에 따라 정리돼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기본계획’, ‘5개년 계획’이라 일컬어지는 거대 계획에 대한 필자의 신뢰는 많이 떨어졌다. 전체를 조망하며 또한 세세한 움직임까지 파악하기에는 우리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한국경제는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화려한 모자이크다. 그들의 활기찬 혁신과 성장이 한국경제의 미래로 인식된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모습은 달라진다. 한산한 재래시장, 고단한 노점상, 활력 잃은 농어촌이 산재한다. 성장의 온기는 사회 전체로 퍼지지 않으며, 대기업의 혁신은 국민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고착화된 양극화의 모습이며 이중구조의 전형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경제의 희망을 근본적으로 저해한다. 복지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지도 않다. 고복지 고성장 모델은 사람경쟁력과 지역경쟁력이 강화되는 곳에서만 작동된다. 경제의 저변을 끌어올려줄 새로운 성장 모델이 필요하나 아직까지 우리는 제대로 된 대답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시선을 국가에서 마을로 바꾸는 순간 한국은 너무 넓고 다양한 공간으로 변한다. 마을은 대도시의 한가운데, 변두리의 뒷골목, 산과 들에도 존재한다. 군·구 단위일 수도, 읍·면·동 단위일 수도 있다. 강조하려 하는 것은 한국경제를 구성하는 기초단위 하나하나에서 새로운 혁신의 경로가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이중구조의 강고한 벽을 깨버릴 수 있다. 지난달 31일 경기도 성남에서 개최된 사회적경제 박람회는 이러한 혁신의 일단을 보여준다. 영세 상인들이 협력해 만든 공동 브랜드, 중증장애인 작업장에서 만든 맛난 쿠키, 식가공과 재활용의 다양한 제품들이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혹자는 자본이 없는데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자본은 은행의 뭉칫돈, 중장비와 첨단 시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을 자투리땅, 노인정 귀퉁이, 방과후 텅 빈 교실 등도 제대로 활용된다면 훌륭한 자본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실현시킬 사람들의 조직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정책적 주안점은 대체로 마을이란 단위 바깥에 존재했다. 가난 극복의 새마을운동을 지나 경제의 고도화 과정은 마을과 지역의 경계를 뛰어넘는 산업시설의 집약 과정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성공적인 이력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시점을 전환할 때다. 허약해진 마을을 튼튼하게 하는 것, 이것이 지역 발전의 뿌리이며 국가 균형 발전의 근간이라는 인식이다.
국가균형발전특별법도 마을을 경시하기는 마찬가지다. 법에 의하면 광역 단위의 시·도지사는 지역 발전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 즉 지역산업과 일자리, 교육, 환경, 복지 등이 포함된 발전계획을 5년 단위로 입안하게 돼 있다(제7조). 중앙정부는 이를 토대로 지역발전 계획을 수립하며(제4조),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가 이 계획을 심의한다(제22조). 하지만 혁신 공간으로서의 기초 단위(군·구·읍·면·동)에 대한 언급은 없다. 주관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의 성격은 공단 설비조성 등과 같은 대형사업에 치중할 가능성을 크게 한다.
2012년 지역 발전을 화두로 지구촌을 헤맨 적이 있다. 스코틀랜드 북부, 그 척박한 땅에서도 지역의 활동가들은 꽤 살 만한 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정부가 무엇을 해주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런던은 저 지평선 너머에 있을 뿐이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스페인의 빌바오, 이탈리아의 트렌티노에서도 중앙정부 혹은 주정부의 지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조직하고, 지역의 가용한 자원들을 모두 가동시키는 노력이 먼저였다. 한국에서도 원칙은 마찬가지다. 주민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 지역의 자원을 재발견하는 것, 마을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경제정책, 그것을 구상할 시기가 아닐까 한다.
김종걸(한양대 교수·국제학대학원)
[경제시평-김종걸] 마을중심의 새로운 경제정책
입력 2014-11-05 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