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행한 통장편지를 아시나요? 입금할 때마다 통장에 표시되는 ‘내용’ 란에 글자를 넣어 완성하는 편지인데요. 오늘은 제가 본 것 중 가장 감동적인 통장편지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최근 한 페이스북 커뮤니티엔 ‘아빠의 통장’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장의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네모난 물건이 흰 종이에 싸여있는 모습입니다. 종이 위에는 ‘서영이꺼’라는 손글씨가 적혀있습니다.
서영씨가 받은 건 통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된 통장입니다. 입금 날짜가 1994년부터 시작하네요. 날짜 옆 공간에는 하루나 이틀, 많게는 한달씩 건너 뛰어 남겨진 글자들이 적혀있습니다.
‘사랑하는/나의/딸들아/너희들/은 영원/한 나의/보물이다.’ 6개월에 걸쳐 완성된 구절은 이 통장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는 걸 알게 합니다.
편지는 5년간 계속됐습니다. ‘아빠가/너희들을/위해서/무엇을/해줄까’ ‘꿈을 갖고/예쁜/서영이.’ 짧은 문장 속에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도 듭니다. ‘창밖에/눈발이/날린다’ ‘비가 왔다’ ‘서영아!’
딸이 성장하면서 내용도 조금씩 바뀝니다. ‘밥 좀/먹어라’ ‘손 좀/빨지/말아라’ 같은 잔소리부터 ‘말성꾸럭(말썽꾸러기)’ ‘똥개’ ‘얼렁뚱땅/피아니스트’ 등 남다른 애정표현(?)도 보입니다. 그림 그리기 상을 탄 딸에게 보낸 축하인사도 있네요. 가족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메시지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납니다.
이 게시물에 2만명에 가까운 네티즌들이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감동받았다”며 댓글을 단 사람 중엔 실제 서영이란 이름을 가진 분들도 많았는데요. 진짜 ‘서영이’를 찾아 사진 속 출처를 쫓았습니다. 그리고 2일 드디어 김서영(22)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느라고 부모와 떨어져 살고 있는 서영씨는 지난 학기 중 어머니로부터 통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안 하신다”며 “통장을 보고 울컥해 눈물이 났다”고 하더군요. “사진이 상업적으로 무단 도용되는 걸 보고 상처를 받았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서영씨의 요청으로 페이스북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은 삭제된 상태입니다.
서영씨의 아버지 김현수(52)씨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씨는 “편지나 선물이라고 생각해 시작한 건 아니다”라며 “당시 집사람과 맞벌이를 하다보니 친가와 외가에 각각 아이들을 맡겼다. 주말에 한번씩 보는 상황이었다. 그때의 감정들이 그런 식으로 표현됐다”고 말했습니다. 통장은 서영씨 자매의 출생기념 통장이라고 하네요.
통장을 두고 딸과 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버지들이 표현을 잘 못하잖아요.”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통장편지 속엔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글자도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아버지의 속마음, 오늘은 글 대신 말로 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
[친절한 쿡기자] 딸바보 아빠의 ‘통장편지’
입력 2014-11-03 04:15 수정 2014-11-03 1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