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구순에도 꺼지지 않은 詩心… 老시인들, 한자리서 황혼을 노래하다

입력 2014-11-03 02:02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김남조(87) 시인의 ‘그대 있음에’는 가곡으로도 발표돼 애창됐다. 그렇게 국민적 사랑을 받은 여류 시인도 세월을 비켜가진 못했다. 올 봄 대동맥협착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은 데 이어 여름에는 오른손 손목 골절상으로 한 달 남짓 깁스를 했다.

누구든 늙는다. 심신의 쇠약과 잦은 와병으로 점철되는 노년의 일상은 무기력해지기 쉽다. 그런 통념을 깨듯 팔순, 구순의 원로시인들이 사그라지지 않는 시심(詩心)으로 한자리에 모여 황혼을 노래했다.

시 전문지 ‘유심’은 최근 발간한 11월호에서 ‘원로 시인의 안부를 묻다’ 특집을 꾸며 노시인들의 근황을 신작시와 함께 전했다.

문단 최고령의 황금찬(96) 시인을 비롯해 김남조 정완영 김종길 김교한 문덕수 장순하 박희진 최승범 강민 신현득 김후란 민영 등 팔순을 넘긴 시인 13명이 소개됐다.

김남조 시인은 “삶에선 좋은 일, 나쁜 일이 일정한 속도로 지나감을 다시금 알게 됐다”면서 “노년에 이를수록 기력은 쇠진하고 감회는 깊어지면서 날마다가 참으로 심각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기에 삶을 더 소중히 여기며 더 성의 있게 살고자 한다”며 ‘긍정의 정신’을 강조했다.

원로시인들은 고령에도 꺾이지 않는 시 정신을 토로했다. 지난 1년간 항일시집 ‘속 좁은 놈 버릇 때리기’를 완성했다는 신현득(81) 시인은 “노년이라니, 나 스스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서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에 대해 “늦었지만 나도 민족의 한 사람으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이다. 내 무기는 붓”이라고 했다.

문덕수(86) 시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놓아도 시는 아직 놓을 수 없다는 듯이, 아니 놓아서는 안 된다는 듯이 욕심을 냈다”며 시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을 내보였다.

시조시인 이소영씨는 원로 시조시인 정완영(95) 시인의 근황을 전했다. 그는 시조집에 사인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떨어졌음에도 “쉬운 것이 시고 어려운 것이 시야. 시조는 살짝살짝 들었다 놨다 하는 묘미가 있어야 해. 근데 요즘 시조를 옳게 쓰는 사람이 없어”라며 후배 시인들을 질책했다.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1953년 ‘문예’를 통해 등단한 황금찬 시인은 100세를 앞둔 고령에도 ‘커피잔의 구름’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수긍하는 자세로 독자들을 숙연케 했다.

“들은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시인들이 눈을 감으면 가는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그날을 기다립니다. 꼭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날까지 목월 선생님-.”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