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목격자의 가짜 기억

입력 2014-11-01 02:20
영화 '유주얼 서스팩트'의 한 장면.

평범한 주부 에일린은 1989년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어린 시절 일을 기억해내고는 깜짝 놀랐다. 기억 속에는 의붓아버지가 자기 친구를 끔찍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20년 전 실제로 그런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적 증거는 없었지만 에일린의 기억이 당시 사건기록들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경찰은 의붓아버지를 즉시 잡아들였다. 그는 재판에서 살인죄를 선고받았으나 기억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한 심리학 교수에 의해 무죄임이 밝혀졌다. 그 교수가 에일린의 기억이 당시 언론에서 보도한 기사를 보고 환상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기억임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잘못 알고 내보낸 오보까지 에일린이 기억하고 있는 걸 보고 법원은 그녀의 기억이 잘못되었다는 교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런 가짜 기억은 언론 보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종종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목격자들에게 심어진다. 대표적인 예가 용의자들을 일렬횡대로 세워놓고 목격자에게 범인을 고르라고 하는 경우다. 이때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한 수사관이 이 과정에 참관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상황이 목격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수사관이 자신도 모르게 목격자에게 거짓 힌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목격자의 시선이 유력한 용의자에게 이르렀을 때 수사관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목격자들은 이를 포착해 수사관이 원하는 용의자를 지목하게 된다. 문제는 자신의 기억이 틀리다는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목격자들의 기억에 대한 자신감은 감소하지 않지만, 재판관들은 목격자의 자신감을 근거로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억울하게 강력사건 범죄자로 몰린 사람 중 약 75%는 목격자의 잘못된 증언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에는 목격자에 의해 지목된 사람들이 DNA 검사 덕분에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얼마 전 미국 국립연구위원회에서는 심리학자 및 범죄학자들을 동원해 1년 동안 각종 과학적 증거를 검토한 끝에 새로운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보고서의 결론은 ‘목격자의 증언을 재판에 이용할 때는 좀 더 까다로운 기준이 필요하며, 고전적인 범인식별 절차에서 증인을 활용할 때는 좀 더 과학적 접근방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 앞으론 목격자의 증언을 채집하고 이용함에 있어서 좀 더 과학적인 방법과 기준을 사용해야 된다는 의미다.

이성규(과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