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이 길의 끝에서 자폐 소년의 꿈은 이뤄질까

입력 2014-10-31 02:39
지적장애 2급 이용근군이 볼펜과 사인펜을 이용해 그린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 일대의 지도.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고 조각조각 그린 동네를 A3 용지에 다시 옮겨 그려 비산동 지도를 완성했다. 모든 선은 볼펜만으로 그렸고 사인펜은 건물명과 지명을 적는 데 썼다.
종이부채에 대나무를 그리는 자폐성 장애 2급 백종하씨. 그는 그림 재능을 장애인식 개선사업 등에 활용하고 있다. 백종하씨 제공
29일 오후 6시 경기도 안양시 안양1번지. 소년은 번화가 조명 아래 주차된 쏘나타 조수석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골똘히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검정 볼펜을 움켜쥔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보이는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일대를 엿보듯 참고할 뿐이다. 곁에는 학교에서 오자마자 그리기 시작해 이미 완성한 A4용지 4분의 1 크기의 강남권 지도 20여장이 놓여 있었다. 이어 붙이면 서초구·강남구 지도가 완성된다. 좁은 차 안에서 지적장애 2급 자폐아 이용근(14)군의 세상이 지도로 펼쳐지고 있었다.

◇자폐아가 본 세상=용근이가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 전에는 만화와 이정표, 자동차 등을 ‘지독한’ 세밀화로 그렸다. 연현중학교 2학년인 용근이는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밤 11시 문 닫을 때까지 차에 앉아 내비게이션을 보고 지도를 그린다. 그날그날 맘에 내키는 동네가 그림의 주인공이 된다. 28일에는 서울 영등포구와 동작구 일대를 그렸다. 지난주에는 용근이가 하루 종일 내비게이션을 보고 지도를 그리는 바람에 산 지 얼마 안 된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기도 했다. 볼펜으로 그린 자투리 지도를 모아 이따금 A3 용지에 사인펜으로 옮겨 그리는 것으로 지도는 완성된다.

어릴 때는 한번 다녀온 동네를 기억해 지도를 그렸다고 한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수백장.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지도 그림의 ‘스승’이 됐다. 용근이는 “어느 날 갑자기 지도를 그리는 게 재밌어졌다”며 “한번 그린 지도는 기억이 나서 길을 잘 찾을 수 있다”고 수줍게 말했다.

용근이의 특별한 지도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식당을 방문했다가 용근이 지도를 본 어느 지리학 박사는 꼭 연락하라고 명함을 두고 갔다. 입을 다물지 못하던 미대생들은 “꼭 아이의 재능을 살려주시라”고 격려했다. 복지관 선생님들은 용근이의 재능을 알아보고 입소문을 냈다.

그러나 정작 부모님은 고민이 많다. 어머니 정숙자(44)씨는 “아이가 특별한 것은 확실한데 어떻게 이 능력을 개발하고 활용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조언해줄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미래를 고민해 꿈꾸는 법을 아직 모르는 용근이는 부모님 식당에서 ‘요리사’가 되겠다고 하는 상황이다.

◇용근이의 미래는?=자폐성 장애 2급인 백종하(25)씨의 어머니 박현숙(51)씨도 10여년 전 같은 고민을 했다. 백씨는 서예와 캐리커처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고등학교 때부터 최근까지 미술로 입상한 경력만 일곱 차례나 된다.

백씨가 스스로 ‘엄마’를 부른 건 8살 때였지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4살 때였다. 언어능력과 사회성이 부족해도 혼자 컴퓨터에서 한자를 변환해가며 익히더니 모르는 글자가 없어졌고 그런 백씨를 붙들고 가르친 외할아버지 덕에 사군자 등에도 능통하게 됐다.

용근이와 백씨처럼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폐성 장애인을 ‘서번트증후군’ 환자라고 부른다. 뇌 장애가 있지만 특정 부분에선 우수한 능력을 가지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 ‘특별함’을 활용할 길이 많지 않다.

성인이 되면 생계를 위해 작업장 훈련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각각의 재능을 살리기는 불가능하다. 박씨는 “순수미술로 일반인과 함께 진학시킬까 고민도 했지만 아이의 그림을 사람들이 언제까지 격려해주고 따뜻하게 봐줄까 싶었다”며 “아이 재능은 반짝 소비되고 더 어리고 더 신기한 아이에게 대중의 흥미가 기울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면 기분이 좋다’는 백씨의 재능을 의미 있게 살릴 방법을 고민하던 어머니는 장애인식 개선사업에 뛰어들었다. 사회복지법인 등의 행사에서 직접 캐리커처나 부채를 그려 비장애인들과 교감하고 기금을 마련하는 식이다. 재능기부도 했다. 백씨가 다니는 안양시 수리장애인복지관 직원들은 그가 그린 캐리커처를 담아 명함을 만들었다. 박씨는 “비장애인들이 저마다 재능과 다양성을 인정받는 것처럼 장애인의 개성과 재능도 다양한 일자리에서 활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용근이가 성인이 될 무렵엔 백씨와는 또 다른 길이 열릴까. 지난해 기준으로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지적장애인은 17만8866명, 자폐장애인은 1만8133명이다. 진단을 따로 받는 것은 아니지만 통계에 따르면 자폐성 장애인의 10%가량이 광범위한 의미의 서번트증후군에 속한다.

안양=전수민 기자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