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제주 성읍교회] “죽으면 죽으리라”… 敎難의 터에 십자가 세우다

입력 2014-11-01 02:40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교회 앞 송승언 장로·이필자 권사 부부(왼쪽). 예배당 앞 제주 현무암 코이노니아석(오른쪽).
1934년 제주노회 교역자수양회 기념사진(왼쪽). 성읍교회 설립자 이기풍 목사 가족(오른쪽).
'예수쟁이'가 없었다. 혼기 찬 교회 처녀 이필자의 어머니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교회 청년을 찾았다. 제주 섬 내에서 교회 다니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더욱 없었다. 그 처녀의 부모는 신실한 청년을 딸의 배필로 달라며 새벽 제단을 쌓았다. 그 어머니는 6·25전쟁 피란민을 통해 예수를 영접했다. 그 딸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골 3:20)이라고 믿었다. 이필자가 스물세 살 되던 해 멀리 정의 성읍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반듯한 청년이 있다는 중신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하나님 제 딸에게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기뻐했다.

제주도 북쪽 구좌읍 바닷가 김녕교회 이필자는 이렇게 정의 성읍교회 청년 송승언과 결혼했다. 동갑내기였다.

그것이 1960년 1월 6일이었다. 그때 신부는 트럭을 타고 80리(32㎞) 떨어진 성읍교회에 도착했다. 비포장 산길을 트럭 타고 가는 것도 다행인 시절이었다. 신부는 면사포를 썼다. 김녕교회에 일본에서 유학한 이가 있었는데 그가 일본서 사온 면사포였다. 결혼식 때면 신부 되는 이들이 돌려썼다.

이 ‘교회 오빠’ ‘교회 누나’는 지금 각기 장로·권사가 돼 제주의 뿌리 깊은 신앙인이 됐다. 신앙을 가진 이래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주의 종으로서 순종하는 송승언(77) 이필자(77)씨 부부 얘기다.



천주교회당 떠난 자리 세워진 성읍교회

부부는 정의 성읍민속마을 내 성읍교회 입구에서 갈옷집을 한다. 아들 내외와 함께 20여년을 꾸려왔다. 풋감 물을 들이고, 정성스럽게 재단해 제주의 멋을 더한다. 그 가게 유리창을 통해 성읍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그 십자가 종탑은 두 부부와 교인들이 현무암을 쌓아 올렸다.

지난 28일 성읍교회를 둘러본 뒤 갈옷집에 들렸다. 민속마을 골목마다 중국인 관광객이 제주의 가을 정취를 즐겼다. 아들 내외는 이날 제주종합경기장에서 열리는 ‘제95회 전국체육대회’를 보러 갔다고 했다.

“성읍교회는 순교자 이기풍 목사(1865∼1942)가 1909년 세운 교회입니다. 제주시 성내교회에 이은 제주의 2번째 교회죠. 제 아버님이 이 목사님을 도와 교회를 이끄셨어요.”

송 장로는 작고한 아버지(송영복·성읍교회 영수) 얘기를 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곳 성읍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순박한 시골교회 장로다. 그가 크리스천으로 산 한평생은 ‘예수 믿는 고통’ 자체였다. 섬 특성상 기독인에 대한 박해가 유난했다.

성읍교회 설립은 고난을 자처하는 일이었다. 1908년 제주 선교에 나선 이기풍 목사는 송영복과 함께 지금의 성읍리 901번지 기도처를 인수한다. 문 닫은 천주교회였다.

천주교회가 문을 닫은 직접적인 이유는 ‘이재수의 난’ 때문이었다. 1901년 신당과 신목 등을 제거하며 세를 확장하던 천주교인과 이들을 비호하던 관리들의 학정에 들고 일어선 제주 백성들은 제주성을 함락시키고 천주교인 300여명을 처단했다. 그 우두머리가 이재수였다. 봉세관(세금 징수를 하던 벼슬아치)의 탐학, 제주바다에 진출한 일본의 어업독점욕에 따른 천주교 축출 의도, 신당 훼손 등과 같은 극단적 포교 등이 민란의 원인이 됐다. ‘제주교난(敎難)’이라고도 불린다.

‘이재수의 난’을 전후해 정의읍성 천주교회는 빈 교회로 남게 됐다. 백성들의 위협에 노출된 교회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그 교회 터가 어떤 곳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당과 신목 등이 있던 자리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현 성읍교회당 안에 신목으로 떠받들어졌기에 충분한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한다.

송승언 장로, 김필자 권사 부부의 눈물

바로 이런 ‘야소(예수)’에 대한 백성의 살의가 가시지 않은 곳에 성읍교회가 있다. 훗날 영수가 되는 송영복이 이기풍 목사를 모시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교회 문을 연 것이다.

“박해야 말도 못했죠. 교난이 지나간 자리의 교회를 누가 나오겠어요. 오직 아버지와 몇몇 교인이 기도로서 지켜왔지요. 더구나 1948년 ‘제주 4·3사건’과 1950년 6·25동란(6·25전쟁)을 겪으면서 주민들이 살기 위해선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교회에 얼씬도 안 했죠.”

송 장로는 어린 시절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왕따’였다. 자녀를 밭에 내보내 일 시켜야 하는데 쭈르르 교회로 달려가 놀기 바쁘니 교회라는 곳은 원성의 대상이었다. 예수귀신 접할까 봐 두려할 만큼 무지했다. 따라서 영수 아들은 교회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전쟁이 나자 많은 피난민이 제주로 몰려왔어요. 그때 교회가 가장 붐볐어요. 20평 남짓한 예배당에서 100여명이 예배를 봤어요. 목사님도 세 분이나 피난 와 계셨고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교회는 다시 10명 미만이 되고 말았어요.”

죽음과 관련된 미신은 마을 사람을 지배했다. 전도사, 목사 등이 주민 전도에 전력했으나 “아무거나 잘 믿어서 천당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며 교회 출석을 외면했다. 그러니 목회자가 수시로 바뀌었다. 오직 송 장로 내외와 몇몇이 기도로 이끌었다. “어멍(엄마)만 예수쟁인줄 알았는데 딸도 예수쟁이여…”하고 놀림 받았던 김필자 권사가 시집온 후에도 유·무형의 박해는 이어졌다.

“시아버지가 소천하시자 마귀가 들끓어요. 창문을 때려 부수고, 술 취해 행패를 부리는 이들이 있었어요. 그저 착한 장로님(남편)은 어쩔 줄 모르고요. 그 교회를 지켜내느라….”

이 권사의 볼에서 눈물이 폭포줄기처럼 흘렀다. 그리고 어느 해(70년대 초로 추정) 큰 비가 이곳 제주 중산간지방에 내렸다. 저지대에 위치한 교회는 강대상 높이까지 물에 잠겨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교적부, 당회록 등 모든 역사자료가 씻겨 내려갔다.

“예배당 마룻바닥 뒤집어진 건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이기풍 목사님과 시아버지가 눈물로 쌓은 제단의 기록들이 떠내려가 버렸으니 이를 어째요. 몇날 며칠 잠 못 자고 ‘하나님 용서해주세요’라고 빌었어요.”

그 뒤로도 부부는 교회당 돌 하나, 화단의 꽃 한 송이까지 애정을 실어 교회당을 꾸몄다.

어느새 그 ‘교회 오빠’와 ‘교회 누나’는 팔순에 이르렀다. 옛날만큼의 구령 활동도 섬김이 쉽지 않다. 부부는 1남 4녀 중 첫째 딸 명희(52·평택 평안교회 전도사)씨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것에 감사해 한다.

부부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교회가 부흥해 정의 고을 사람들이 저마다 성경을 안고 성읍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는 부부다.

제주 두 번째 교회, 핍박과 무기력

정의읍성은 조선 세종 당시 축성된 성이다. 동·서·남문이 있었다. 1984년 성읍 안팎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됐고 그 성곽과 남문, 서문이 복원됐다. 교회는 남문 안쪽 우측에 있다. 성곽 형태를 갖춘 읍성 안에 교회당이 자리한 유일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현재 읍성 안에는 9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정부가 주민의 성 밖 이전을 권하고 있다. 성 밖으로 400여 가구가 옛 정의현읍의 명맥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성읍교회(김정주 목사) 주일 출석은 3명 안팎이다. 마을 가까이에 교회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교인 수가 정체 상태다. 깊은 상처를 경험한 주민들의 배타성이 그 첫째 원인이다. 그 지독한 배타성은 교회 존립마저 흔든다.

김 목사는 부득이 교회 안에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며 유지한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본질과 역할’을 놓고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송 장로 부부는 제주 영락교회로 출석한다. 그것은 한국의 시골교회 또는 작은 교회가 안고 있는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105년 전통의 3명 안팎의 교인 수 성읍교회. 예배당 현관 앞 현무암 기도 돌의자 7석과 교회 담 안쪽으로 동백과 각종 꽃, 10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 등이 어우러진 성읍교회는 그저 먼발치에서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제주 전역에 교회 설립한 이기풍 목사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 7명 중 한 명.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고 제주선교사로 파송됐다. 당시 제주는 '해외 선교' 개념이었다. 제주 성내교회를 비롯해 성읍교회, 김녕교회, 삼양교회 등 제주 전역에 교회를 세우며 전도활동을 했다. 호남 지역 기독교민족운동가로 활동했다. 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검속돼 고문 등을 받고 병 보석됐으나 1942년 6월 끝내 순교하고 말았다.

서귀포=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