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칼럼] 춤추시는 하나님

입력 2014-11-01 02:22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언젠가 그의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자신들의 신을 믿기를 바란다면 노래를 보다 더 잘 부르고, 구원받은 사람들답게 얼굴에 팔복의 즐거움이 나타나야 할 거야. 나는 춤추는 신만 믿을 수 있네.”

니체가 진정 춤추는 신은 믿을 수 있다고 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었어야 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 있어야 할 구원받은 기쁨과 즐거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누가복음 15장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춤추시는 아버지로 비유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탕자의 비유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 집에서는 춤추며 즐거워하는 잔치가 벌어졌다(25절). 이때 아버지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었을까. 아마 앞장서서 춤을 추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함께 춤추자고 초청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하나님 개념을 바꾸어주셨다. 하나님은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아들과 함께 춤추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시드니 카터의 ‘춤추시는 하나님(Lord of the Dance)’이라는 시가 있다. 전통 음악에 붙여져 노래로도 많이 불리는 시다. 일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이 창조된 그 아침 난 춤을 추었다./해와 달과 별에서 춤을 추고/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춤을 추었고/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나는 안식일에 춤을 추고 앉은뱅이를 고쳤다/거룩한 사람들은 이것은 모욕이라 말하며/옷을 벗겨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높이 못 박아/피 흘려 죽이려 하였다./마귀를 등에 지고 춤추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흑암이 뒤덮인 하늘 아래서도 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춤을 추었다./그들은 나를 무덤에 묻어버리고 내가 사라졌다고 믿었지만/나는 춤추는 하나님, 나는 여전히 춤추고 있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한 후 너무 기쁘셔서 춤추셨다고 표현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 앞에서도 춤을 추셨다고 한다. 그 모든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웃고 마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 춤추고 싶을 정도의 기쁨으로 감당하셨다는 것이다.

춤추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하는 춤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이다. 춤이라는 단어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체험의 비밀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춤으로 초대하실 때 그 춤은 하나님이 주도하는 춤이다. 우리는 춤의 왕이신 하나님의 리듬과 스텝에 맞추면 된다. 내가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내 안에서 사는 인생이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인생이다.

우리가 초대받은 춤은 자기 포기이다. 자발적으로 기쁘게 자신을 포기할 때 우리는 그 춤을 더 잘 출 수 있게 된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난 날부터 죽음을 맞을 때까지 세상을 살았던 방식이다.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은 그의 삶 속에서 자신을 춤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세상은 슬픔과 기쁨이 서로 극과 극으로 나뉘어 있다. 슬픔은 슬픔이고 기쁨은 기쁨이다. 이 둘은 서로 만날 수 없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춤이 시작되는 첫 스텝이 바로 슬픔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춤의 무대로 초대하는 첫 번째 초청장이 슬픔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슬픔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시며 춤추자고 청하신다.

“너의 슬픔을 춤으로 변화시켜 주리라. 슬픔을 외면하거나 부인하지 말고, 슬픔을 통과하며 그 슬픔을 허락한 나의 뜻을 깨달으라. 일어나라. 나와 함께 춤을 추자.”

하나님은 왜 기쁨이 아닌 슬픔으로 먼저 초청하실까. 우리가 기쁨 속에서는 자신의 리듬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를 기뻐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다. 하지만 슬픈 일을 당했을 때는 자신을 내려놓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춤추는 비결이다. 혹시 슬픔 속에 있는가.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춤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소망한다.

이재훈 (온누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