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게토(ghetto)화된 교회의 언어

입력 2014-10-31 02:41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려운 얘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 청중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함께 느끼며 생각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이 곧 존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흔히 ‘언어의 종교’라고 합니다. 말씀의 증언과 같이 언어에 중점을 두는 것은 이를 반증합니다. 또 예수님을 눈으로 보이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인 성육신은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의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예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 외국어로 말합니다.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복음을 듣고 이해합니다. 하나의 언어만을 절대시하는 바벨의 언어와 달리 성령의 언어는 다양한 언어를 통해 진리를 전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교회가 사회에서 고립됐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게토(ghetto·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거주 지역)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힘에 의한 선교를 자행했고, 책임과 절제 없이 오만하게 주장을 내세우며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켰습니다. 사회는 그저 교회 성장을 위해 동원하는 ‘자원’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교회적 언어가 아니라 일반적 언어로 교회와 사회의 결속력을 다지는 것입니다. 일반적 언어란 인권과 인류애, 박애주의와 인도주의, 세계화와 같이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종교적 가르침에 근거한 인격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이 땅 가운데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성도들도 바른 신앙인, 바른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자신들의 축제에 집중해 사회와 스스로를 구분지었고, 그 결과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마치 이기적 태도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바벨의 언어와 같이 하나의 절대적 언어, 폐쇄적 언어가 아니라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여러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대한 것은 상대방과 동일화된다는 것인데, 이처럼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방법도 없습니다. 웃는 사람과는 함께 웃어야 하고 우는 사람과는 함께 울어야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탁월한 선교정책이었던 것입니다. 이 정신을 먼저 구현하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이야말로 이 정책의 절정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말씀 그대로 삶을 살 때 교회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이 아파하는 곳에 가지 않고, 힘 있는 곳에만 있으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교회는 서성거리고 갈 길 모르는 사람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 언어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바벨의 언어를 버리고 이 시대 성령의 언어인 ‘약자의 언어’ ‘고통 받는 이웃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김종생 목사(온양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