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달자] 베짱이의 노래는 지금도 있다

입력 2014-10-31 02:10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남은 그림 한 장의 기억이 새롭다. 앞치마를 두른 개미가 문 앞에 서 있고 베짱이는 문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밥 좀 줘”하는 그림이다. 개미 집 안에는 난로에 물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따뜻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자, 이런 사진에서 누가 문 밖에서 떨며 밥을 구걸하는 베짱이가 되겠는가.

그래서 선생님들은 개미가 되라고 세뇌를 시켰다. 해서 우리는 개미가 되려 했다. 두 손에 힘을 꽉 주며 “그래 우리 개미가 되자”라고 일기장에도 썼던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부지런한 개미가 자신의 몸보다 큰 먹이를 한여름 뙤약볕 속을 어떻게 끌고 갈 수 있었을까. 개미는 힘이 억세게 센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며 생각했다. 개미가 자신의 몸보다 더 큰 먹이를 끌고 뙤약볕 속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베짱이의 노래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베짱이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놀고먹은 것이 아니라 베짱이도 만약 가수였다면 일을 한 것은 아닐까. 예술을 돈으로 지불하지 않는 무지한 시대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선가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음악이 있고 미술이 있고 문학이 있지만 미술치료니 음악치료니 시치료가 있지만 정작 우리가 어디에서 위안을 받고 우리가 고통스럽고 상처 많은 시절을 견디며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고 밥을 먹고 돈으로 호사를 하지만 외롭고 쓸쓸하여 내상이 심한 사람들의 위안은 정작 돈을 지불하지 않고 소위 문화라는 아주 작은 계기에서 죽음을 삶으로 전환하는 일이 왜 없겠는가.

사실은 널려 있는지 모른다. 한옥 기와집 처마밑에 흐르는 가을햇살이나 한강의 묵묵한 흐름이나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새벽에 등교하는 학생이나 직장인들도 보통의 일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위안과 응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베짱이의 노래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워한다. 가을을 타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내일 점심 약속도 하나 있고 내일까지는 먹을 사과가 남아 있는데도 어깨가 이리도 시려서 영 힘이 나지 않는 나는 어디선가 베짱이의 노래가 있다고 믿고 있다.

신달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