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죽은 ‘교수’의 사회

입력 2014-10-31 02:02
지난 28일 저녁 서울 대학로 유니플렉스에서 패션기업 마인드브릿지와 출판사 휴머니스트 공동 주최로 열린 ‘도정일(왼쪽 두 번째)-최재천(오른쪽 두 번째) 대담’. ‘대담’ 출간 이후 9년 만에 다시 재회한 두 석학은 대학의 운명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다며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휴머니스트 제공
“오늘날의 대학은 교수라는 존재를 계속 유지하는 일이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래서 ‘최후의 교수들’이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영문학과 정교수인 프랭크 도너휴는 자율적이고, 종신재직이 보장되며, 가르치는 일은 물론 연구와 집필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교수의 모습은 최소한 인문학 분야에서는 곧 멸종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과장일까? “대학의 운명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다. 아주 길게 잡으면 50년? 짧으면 20년이나 될까?” 이 말은 지난 28일 한 대담회에서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학장인 도정일 교수가 한 말이다.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가 꽤 오래 전부터 거론됐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도 교수의 대담 파트너였던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도 “어느덧 대학은 그냥 직업훈련소가 돼버렸다”면서 “요즘 같아서는 대학교수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도너휴 교수는 책에서 미국 대학과 인문학 교수들의 현실을 냉혹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테뉴어트랙이라는 종신교수제의 축소, 비정규직 교수들의 급증, 우리의 ‘보따리장수’에 해당하는 시간강사들의 ‘고속도로 인생’, 우수한 학생이 먼저 탈락하는 인문학 대학원의 풍경, 살아남기 위해 영업사원처럼 변해가는 젊은 학자들이 모습 등은 우리 대학들이 그동안 보고 따라간 미국 대학이 맞나 싶을 정도다.

우리 사회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아카데미즘, 최후의 아카데믹한 삶의 방식마저 끝내 허물어버리는 힘은 무엇인가? 식상할지 모르지만 저자는 자본주의를 주범으로 지목한다. 기업 자본주의와 대학 인문주의의 오래된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위기를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미국 자본주의와 인문학의 관계는 역사 이래 불편한 사이였다.

“세상이 이렇게 엄혹한데, (전통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이 야만스런 히브리인과 그리스인들을 귀감으로 받들며 제 몫을 해내겠다는 말입니까? (중략) 셰익스피어와 호머가 그들을 키워내는 토양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1891년 미국 필리델피아의 한 대학 졸업식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카네기는 인문학의 토대를 이루는 전통적 자유교양 교육에 대해 가장 먼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인물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산업계는 인문학을 적대시해 왔다. “문학 취미를 가진 사람은 아무런 행복을 누릴 수 없다. 현실의 삶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쓸모 있는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1909년 이런 얘기를 한 미국 기업가도 있었다.

인문학은 줄곧 수세였다. “엄격히 경제적 용어로만 정의되는 ‘유용함’을 이상으로 받드는 태도에 맞서서 인문학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분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패배했다. 이제는 교수들마저 기업의 경쟁논리를 내면화했고, 수많은 대학이 스스로 기업이 됐다. 교수들은 “기업과 시장은 언제나 성공을 거두어왔다. 그러니 대학이 기업처럼 움직이는 것이 왜 문제란 말인가?”라는 미국 자본주의의 질문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

교수라는 직업, 인문학이라는 교육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둘은 같은 운명이다. 저자는 교수는 명목상 사라지지 않겠지만 넓은 의미의 전문직 및 서비스 노동자라는 범주로 흡수될 것으로 전망한다. 또 인문학을 주축으로 하는 고등교육의 자유교양 모델은 붕괴될 것이고, 앞으로 10년 후쯤부터는 자유교양 교육은 점점 특권층만 가능한 사치 품목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본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