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순간, 겨우 터득한 소설 쓰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린다”고 작가 김경욱(43·사진)은 말한다.
1993년 중편소설 ‘아웃사이더’로 등단해 21년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온 그가 열세 번째 책인 소설집 ‘소년은 늙지 않는다’(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막막하기 때문에 또다시 쓰게 된다. 그리하여 언제나 첫 소설, 첫 문장을 쓸 수 있다”는 작가는 그래서 이 책은 ‘첫 책’이라고 소개했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9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주인공은 대체로 왜곡된 시각을 가진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2012년 이상문학상 후보작 ‘스프레이’를 보자. 백화점 구두 매장 직원인 주인공은 실연의 원인을 다한증 탓으로 돌린다. 축축해진 손으로 그녀를 처음 잡은 후 결별 통보를 받았으니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단다. 남의 택배를 잘못 가져온 이유도 이웃집 고양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일상에 침입해 잠을 깨운 고양이를 탓하는 그는 맹목적인 단정 끝에 복수를 계획한다. 이는 고양이 주인인 옆집 여자를 향한 집착과 스토킹으로 이어진다.
다른 수록작의 인물도 그렇다. 입사 이래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으며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사극을 즐기는 사내(염소 주사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월남에 갔다가 화랑무공훈장을 받을 뻔했으며 이제는 제 시간을 맞추려고 양팔에 각각 시계를 두르고 다니는 노인(아홉 번째 아이), 뇌물을 굳이 돌려주다가 상사에게 밉보여 좌천된 남자(승강기) 등이다. 지독하게 선량하고 원칙적인 이들은 자신의 신념에 복무하느라 영원히 크지 못하는 소년이 된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에는 빙하기의 도래로 눈 덮인 마을에 유기된 채 살아가는 소년이 나온다.
작가는 이 책에서 수많은 ‘소년’을 등장시켜 최소한의 신뢰마저 무너진 약육강식의 사회 속에서 이들이 왜 성장을 멈추게 됐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직접적인 서술 없이 오로지 인물의 행동과 이야기의 짜임만으로 이를 드러내는 것이 흥미롭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
[책과 길] 약육강식의 사회… 성장판 닫힌 ‘소년’들
입력 2014-10-31 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