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의 눈물] 대학원생들, 교수님 너무합니다

입력 2014-10-30 02:53

자연계열 박사과정인 A씨(31)는 최근까지 지도교수의 자녀들에게 무료로 과외 교습을 해줬다. 학업과 연구를 병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이 과외는 거른 적이 없다. 부당한 지시인줄 알고 있지만 논문 심사 등 자신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교수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은행 업무를 비롯해 각종 잔심부름도 도맡았고 심지어 지도교수가 이사할 때는 연구실 동료들과 이삿짐을 나르고 집 청소를 했다.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생 B씨(32)는 학위논문 심사 거마비 명목으로 교수들에게 줄 적지 않은 돈을 준비해야 했다. 심사위원 1인당 현금 50만∼100만원씩 ‘상납’하는 게 관례였다. 심사가 진행되는 중에는 한우전문점·고급일식집 등에서 한 끼에 수십만원 하는 식사를 접대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 받는다는 건 대학원생 사이에서는 상식이었다. 조교 업무 등으로 받는 수입은 월 100여만원에 불과해 지인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학원생들이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에 토로한 고충 사례들이다. 청년위는 29일 ‘대학원생 연구환경 실태 보고서’를 발표했다. 우월적 지위를 악용한 교수들의 횡포 사례가 나열돼 있다. 성희롱·언어폭력은 물론 금품 제공 강요, 연구물 가로채기 등 다양한 ‘갑(甲)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생 C씨(26·여)는 “공동연구로 시작한 논문을 제가 모두 완성했으나 지도교수가 연구 실적이 필요하다며 저자에서 (나를) 배제했다”고 했고, 자연계열 대학원생 D씨는 “(지도교수가) 교수님 부인을 내 논문의 공저자로 기재하라고 했다”면서 억울해했다. 대학원생의 아이디어와 실험 결과를 도용해 유명 학술지에 교수 이름으로 투고하거나 특정 학생을 졸업시키려고 대학원생에게 사실상 논문을 대필시키기도 했지만 대학원생들은 불이익이 두려워 함구하고 있었다.

청년위 설문조사는 이 같은 부당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5.5%가 부당한 처우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전공별로는 예체능 계열이 가장 심각했는데 51%가 부당 처우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어 공학계열(47%) 자연계열(45%) 의약계열(44%) 순이었다. 부당한 처우를 당한 대학원생 65.3%는 ‘참고 넘어갔다’고 했다.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서’(48.9%)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43.8%) 등이 이유였다. 설문조사는 지난 6월 5∼10일 실시됐으며 전국 13개 대학 대학원생 등 2354명이 참여했다.

청년위와 대학원 총학생회들은 이날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발표하고 개선책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포스텍 강원대 건국대 경희대 상명대 서강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국외대 한국항공대 한양대 홍익대 등 14개 대학이 참여했다. 권리장전은 모두 14개 조항으로 ‘지식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