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항] 계획적 진부화

입력 2014-10-30 02:10 수정 2014-10-30 15:25

면도날을 사러 마트에 가 보면 면도기까지 포함된 최신 제품 한 팩의 값이 내가 원하는 구형 면도날 한 팩 값보다 더 싼 경우가 많다. 면도기에 장착된 날까지 감안하면 누가 봐도 합리적 선택은 신형 면도기 팩이다. 그렇지만 사고 나면 찜찜하다. 세면대 옆에는 무수한 면도기들이, 심지어 똑같은 모델인 면도기 네 개까지 나뒹굴고 있다. 구형 면도기를 빨리 버리게 하고, 더 비싼 새 모델에 길들이려는 얄팍한 상술임을 알면서도 매번 멀쩡한 면도기를 낭비하는 선택에 빠지고 만다.

소비재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하거나 그 안에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을 ‘계획적 진부화’라고 한다. 프린터의 수명을 제한하기 위해 인쇄 매수가 1만8000장이 넘으면 자동 멈춤이 이뤄지는 칩을 심었다거나, 마모되지 않는 면도날 특허를 소유한 기업이 이의 생산을 포기했다는 논란이 사례들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에 따르면 1924년 미국에선 전구 제조사들이 2500시간이던 평균 수명을 1000시간 이하로 제한하자고 담합했다. 가전제품이나 휴대전화 등 내구재의 경우 제품 보증기간이 끝나자마자 고장이 나도록 설계했다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 실시를 계기로 보조금 제한이 없는 구형 단말기나 할인혜택이 도입된 중고 단말기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2년 전 출시된 베스트셀러인 갤럭시S3는 매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중고품을 사려 해도 메인보드나 액정 등 부품을 교체·수리하고, 배터리를 교체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일부 외국에서 2년인 단말기 보증수리 기간이 국내에서는 1년에 불과한 탓도 크다.

우리나라의 스마트폰 단말기 교체주기는 평균 15.6개월로 압도적인 세계 1위다. 피처폰을 포함한 전체 단말기 교체주기는 20개월로 2위권 국가의 24개월보다 월등히 빠르다. 일본은 4년이다. 스마트폰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광물과 유해물질이 파헤쳐지고, 버려진다. 합리적, 비판적 소비가 절실히 요구된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