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산수화 속으로… 제천 ‘청풍호 자드락길’서 가을을 만나다

입력 2014-10-30 02:51
충북 제천의 ‘청풍호 자드락길’ 제1코스인 작은동산길 외솔봉 너머로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청풍호와 단풍에 물든 산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리고 있다.
한 등산객이 단풍으로 물든 작은동산길 숲길을 걷고 있다.
괴곡성벽길 새 전망대에서 본 청풍호와 옥순대교의 풍경.
여행의 매력은 의외성이다. 상상하지도 않았던 길에서 산수화가 무색한 풍경과 맞닥뜨리면 첫사랑 연인이라도 만난 듯 가슴이 설렌다. 충북 제천의 청풍호 자드락길이 바로 그렇다. 7개 코스 58㎞ 중 어떤 구간을 선택해도 계절과 시간이 빚어내는 의외의 풍경을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나 할까. 특히 청풍호 물안개와 단풍이 어우러진 가을의 자드락길은 보물찾기 하듯 길섶 곳곳에 느낌표와 쉼표를 숨겨놓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말만 들어도 정겨운 자드락길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작은 오솔길’을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청풍호와 인접한 산자락을 따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걷는 길로 대부분 평탄해 산책을 하듯 여유롭다. 여기에 나지막한 산등성이나 조붓한 오솔길에서 만나는 청풍호와 고만고만한 높이의 산은 열두 폭 두루마리 산수화를 펼쳐놓은 듯 정겹다.

제1코스인 작은동산길(19.7㎞)은 청풍면 만남의 광장에서 시작된다. 유람선이 떠다니는 청풍호는 61개 마을 3031가구가 수몰된 애환의 현장.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면적의 64%가 제천시이기에 이곳에서는 충추호를 굳이 청풍호로 부른다. 이른 아침 청풍호에서 피어오른 물안개와 어우러진 레이크호텔 주변의 단풍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몽환적이다.

교리마을에서 이끼계곡을 거슬러 오르다 모래고개에서 작은 동산에 올라 평탄한 산길을 걷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금수산 자락인 외솔봉이 나온다. 외솔봉 정상을 뒤덮은 넓은 너럭바위는 청풍호를 비롯해 멀리 월악산 영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 오색단풍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너럭바위 아래에는 우뚝 솟은 기암에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린 청송암이 홀로 청풍호를 벗하고 있다.

제2코스인 정방사길(1.6㎞)과 제3코스인 얼음골생태길(5.4㎞)은 능강교가 들머리이다. 정방사길 최고 명소는 신성봉 능선에 위치한 천년 고찰 정방사. 아담한 암자 앞마당에 서면 ‘천(千)의 얼굴’을 가진 청풍호가 망원렌즈로 잡아당기듯 한눈에 들어온다. 능강구곡으로도 유명한 얼음골생태길은 화전민이 살던 곳으로 시나브로 단풍이 짙어가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너덜지대가 나온다.

제4코스인 녹색마을길(7.3㎞)은 능강교에서 출발해 하천리 산야초마을을 지나 상천산수유마을에 위치한 용담폭포에 이르는 느긋한 길이다. 빨간 산수유 열매가 점묘화를 그리는 상천산수유마을에서 30m 높이의 용담폭포와 상탕 중탕 하탕으로 이루어진 선녀탕을 한눈에 보려면 계곡을 건너 폭포 왼쪽 뒤로 이어진 바위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암릉은 급경사 구간이라 곳곳에 철계단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암벽 등반하듯 10분 정도 암릉을 기어올라 바위전망대에 서면 금수산을 진동하는 용담폭포와 선녀탕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눈을 돌리면 손바닥만한 청풍호 뒤로 월악산 영봉의 날카로운 능선이 옅은 안개 속에서 수묵화를 그린다.

제5코스인 옥순봉길(5.2㎞)은 상천산수유마을에서 송호리를 거쳐 옥순대교에 이르는 호반도로로 시종 청풍호를 벗한다. 옥순봉길의 하이라이트는 옥순대교 북단의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옥순봉의 절경이다. 옥순봉은 희고 푸른 여러 개의 봉우리가 마치 대나무 싹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268m 높이의 석벽인 옥순봉은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화첩’에 등장하는 ‘옥순봉도’의 실제 모델로 조선시대 이래 줄곧 제천(청풍) 땅이었지만 단양팔경으로 유명해지면서 단양 땅으로 인식돼 제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여기에는 옥순봉을 사랑한 단양 관기 두향과 두향을 사랑한 퇴계 이황의 러브스토리 때문이라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두향으로부터 옥순봉을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는 청을 받았다. 하지만 청풍군수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퇴계는 단애를 이룬 석벽을 옥순봉(玉筍峰)으로 명명하고 단양에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뜻으로 석벽에 ‘丹丘洞門(단구동문)’을 새겼다.

청풍호를 에두르는 자드락길 중 풍경이 가장 수려한 길은 제6코스다. 옥순대교 남단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괴곡성벽길(9.9㎞)이다. 삼국시대에 쌓은 성벽이 있었다는 괴곡성벽길은 여느 자드락길과 달리 청풍호를 발아래 두고 걷는 특별한 트레일로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번 거듭하면 데크로 이루어진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가 쉼표를 찍는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설치된 데크는 청풍호를 비롯해 옥순대교, 옥순봉, 금수산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포인트. 청풍호 푸른 물을 하얗게 가르는 유람선이 김홍도의 ‘옥순봉도’에 그려진 나룻배처럼 운치 있다. 이곳에서 다시 산길을 조금 더 걸어가면 최근에 설치한 달팽이 모양의 전망대가 하나 더 나온다. 제천의 자드락길 중에서 청풍호와 금수산을 비롯한 주변 풍광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특별한 곳이다.

청풍호 자드락길 제7코스인 약초길(8.9㎞)은 산간마을을 한바퀴 도는 구간이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실향민들이 살고 있는 지곡리 고수골에서 도전리, 서곡리, 율지리를 거쳐 다시 도전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형 코스로 수몰민들의 애환이 청풍호 물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제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