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변창배] 한 알의 밀알

입력 2014-10-29 02:10

덕배시 목사라 불리던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 125년 전에 이역만리 호주에서 한반도를 찾아온 선교사. 멜버른을 떠나서 서울에 도착한 뒤 꼭 6개월 만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1890년 4월 5일에 33세의 젊은 나이에 이 땅에 뼈를 묻은 것이다.

그의 사연도 여느 선교사와 다를 바 없이 극적이다. 데이비스는 1881년 3월 멜버른대학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그해 5월 사립명문학교인 코필드 그래머 스쿨을 창립했다. 1887년 어느 날 중국에서 선교하던 울프 주교의 호소문을 신문에서 읽었다. 1885년 시작된 한국 선교를 위해서 자원할 것을 호소한 글이었다.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성공회를 떠나서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이적하였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 영국 에든버러로 가서 뉴칼리지대학에서 수학했다. 호주로 돌아가 안수를 받은 것은 1889년 8월 5일이었다. 선교사 파송예배를 마치고 같은 달 21일 멜버른을 떠났다. 한 달 반여에 걸친 여행 끝에 시드니 홍콩 나가사키 부산과 인천을 거쳐 서울까지 온 것이다.

그의 마지막 여행은 도보여행이었다. 선교활동에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한 답사여행이었다. 여행 중에 쪽복음서를 팔기도 했다. 3주간의 도보여행 끝에 부산에 도착했을 때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돼 있었다. 게일 선교사와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받았지만 부산에 도착해 하룻밤을 넘기고 사망했다. 그 날이 마침 부활주일이었다.

그 짧은 선교여정 중에 데이비스는 복음 증거를 위한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언어습득도 빨랐고, 선교사들로부터 인품과 실력을 인정받았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거리로 나가서 전도하려고 했을 만큼 급하고 고집스런 면도 있었다. 틈틈이 서상륜과 함께 근처의 마을을 순회하였다. 그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장로교선교공의회’가 창립됐고, 회장에 선임된 의사 헤론을 도와서 서기로 임명되었다. 재주를 인정받은 것이다.

부산진교회에 그의 추모비가 서 있다. 마산 창신대학교에는 그의 순직기념비가 서 있다. 그의 묘는 부산 중구 동광동5가 26번지의 복병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멸실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한국으로 왔던 누이 메리 타보르 데이비스도 곧 호주로 귀국했다.

데이비스의 순직은 호주연합교회의 한국선교를 위한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빅토리아 장로교회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빅토리아 주에 위치한 작은 교회였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데이비스는 청년연합회 파송 선교사였다.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에 큰 관심이 없었다. 도리어 가까운 남반구의 태평양 여러 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데이비스의 사망으로 그를 대신해서 사역을 이어갈 사람을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교제를 위해 조직된 청년연합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단체로 발전했다. 선교의 굳건한 후원단체가 된 여전도회연합회 조직의 계기가 되었다. 멕케이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다.

그 뒤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호주장로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호주장로교회는 감리교회와 회중교회와 통합하여 호주연합교회가 되었다. 데이비스의 뒤를 이어서 한국에 온 선교사는 130명을 헤아린다. 이들 대부분이 멜버른 지역의 교회에서 파송을 받았다. 주로 사역한 곳은 부산과 경남 일원이었다. 지금도 두 명의 사역자가 북한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다음 달 9일에는 그의 추모비가 서 있는 부산진교회에서 한·호 선교 125주년 기념예배를 드린다. 데이비스로 인하여 한 알의 밀알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변창배 목사 (예장통합 총회기획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