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붓으로 세상을 움직인 노론의 영수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에 이어 송자(宋子)로 불렸다. 그는 효종과 함께 북벌을 꿈꾼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 10년 만에 승하하면서 북벌이 무산되자 송시열은 노구를 이끌고 심산유곡에 바람처럼 스며든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송시열이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 화양동계곡이다. 이곳에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속리산 품에 안긴 충북 괴산(槐山)은 느티나무의 고장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느티나무로 꼽히는 장연면 오가리의 느티나무를 비롯해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만 113그루나 된다. 고을 이름조차 ‘느티나무 괴(槐)’를 쓰고 있다. 화양동계곡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람이라도 불면 느티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비가 갈색추억을 노래하며 나그네를 맞는다.
화양동계곡은 울창한 숲과 맑은 물, 그리고 너른 반석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무릉도원이다. 송시열은 이 화양동계곡을 무척 사랑하고 아껴 스스로를 화양동주(華陽洞主)라고 부르며 직접 화양구곡의 위치를 선정했다. 그리고 제자인 수암 권상하는 3㎞ 구간의 구곡에 경천벽(제1곡), 운영담(제2곡), 읍궁암(제3곡), 금사담(제4곡), 첨성대(제5곡), 능운대(제6곡), 와룡암(제7곡), 학소대(제8곡), 파곶(제9곡) 등 이름을 붙였다.
수직절리와 수평절리가 두부모를 자른 듯 날카로운 경천벽(擎天壁)은 기암괴석이 우뚝 솟은 형상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주차장 아래에 위치해 자칫 지나치기 쉽다. 경천벽은 드라마 ‘상도’ 촬영장으로도 유명하다. 오른쪽 바위에는 단암 민지원이 쓴 ‘擎天壁’이 선명하고, 왼쪽 바위에는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경천벽에서 잣나무와 느티나무 가로수가 멋스런 도로를 한참 걸어가면 ‘구름의 그림자가 맑은 소에 비친다’는 운영담(雲影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직절리와 수평절리, 그리고 하식애로 이루어진 삼형제바위가 운영담에 반영을 드리운 풍경이 마치 데칼코마니 기법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넓은 반석인 읍궁암(泣弓巖)은 송시열이 효종의 죽음을 슬퍼해 새벽마다 이 바위 위에서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읍궁암에는 돌개구멍으로 불리는 포트홀과 안내석을 세웠던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있다. 화양서원터에 보존된 직육면체 안내석 4개 중 가장 깨끗한 돌이 어느 해 홍수 때 발견된 가장 오래된 비석이다.
송시열의 울음소리인 듯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한 읍궁암 앞에는 그를 추모하는 송자사(宋子司)와 중국 명나라 신종의 위패를 봉안했던 만동묘(萬東廟) 등이 복원돼 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을 비롯해 원군 23만명을 파병한 명나라의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송시열의 유지를 받든 권상하 등이 건립했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는 아픔을 겪었다.
화양서원이 있던 길섶에는 제주도의 정낭을 닮은 하마소가 보존되어 있다.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하마소는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각각 구멍이 두 개 뚫린 길쭉한 돌에 나무를 끼운 일종의 바리케이드이다. 이 하마소는 훗날 대원군이 화양서원을 철폐하는 원인이 된다.
대원군은 집권 전 말을 타고 전국을 유람하다 화양서원을 찾았으나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생들에게 호되게 봉변을 당했다. 그날의 치욕을 잊지 못한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화양서원을 가장 먼저 철폐시켰다. 유생들의 횡포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화양서원이 철저하게 파괴된 데는 대원군의 사감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시냇가 바위 벼랑 펼쳐진 곳/ 그 사이에 집을 지었노라/ 조용히 앉아 경전의 가르침 찾아/ 시간을 아껴 높은 곳에도 오르리라’
화양구곡 최고의 절경은 맑고 깨끗한 물과 금싸라기 같은 모래가 펼쳐져 있는 금사담(金沙潭)과 금사담 앞 바위절벽에 고즈넉하게 올라앉은 암서재(巖棲齋)이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물들어 가는 산을 배경으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는 암서재는 송시열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3칸짜리 기와집과 함께 송시열의 시 한 수가 전해온다. 햇빛과 달빛에 반짝이던 모래사장은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사라졌지만 물소리에 놀라 파르르 떠는 단풍잎이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화양천 물줄기를 따라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별 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의 첨성대(瞻星臺)가 도명산 자락에 우뚝 솟아있다. 이 바위벽에도 수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은 명나라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송시열의 글씨를 각자한 것이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뜻의 ‘非禮不動(비례부동)’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다.
첨성대 옆 바위에 새겨진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선조가 임진왜란 후에 쓴 글씨로 경기도 가평의 조종암에 새겨진 것을 베껴 옮긴 것이다. 만절필동은 강물이 일만 번을 꺾여 굽이쳐 흐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명나라를 사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 송시열의 결의를 담고 있다. 만동묘는 ‘만절필동’에서 처음과 끝 자를 따온 것이다.
시냇가에 우뚝 솟은 바위가 구름을 찌를 듯 높다는 능운대(凌雲臺)와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바위가 길게 누워있는 와룡암(臥龍巖), 그리고 바위산 낙락장송에 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학소대(鶴巢臺)의 풍경에 취해 걷다보면 하늘에서 오색물감이 방울방울 떨어질 것만 같은 단풍나무 숲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화양구곡의 마지막 절경인 파곶(巴串)은 단풍나무 숲길에서 계곡으로 한참을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돌로 된 골짜기와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만번 돌고 도는 모양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한 파곶은 눈으로 확인하고도 믿을 수 없는 절경이다.
여인의 피부처럼 매끄럽고 하얀 파곶의 너럭바위는 단풍으로 물든 계곡 전체를 보듬고 있다.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이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는 수많은 포트홀은 자연이 만든 천연의 악기라고나 할까. 흐르는 물이 포트홀에서 튕겨 오르며 내는 소리는 오케스트라의 화음처럼 장엄하고, 리드미컬하게 여울지는 물결은 무희의 몸놀림처럼 경쾌하다.
우암 송시열이 ‘물은 청룡처럼 흐르고 사람은 푸른 벼랑으로 다닌다’고 한 파곶은 성리학적으로 학문의 완성을 뜻하는 곳이자 괴산의 가을이 완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괴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가을은 화양구곡서 마침표를 찍는다… 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던 괴산 화양동계곡
입력 2014-10-30 02:46 수정 2014-10-30 1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