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분의 대통령을 모시고 20여년의 청와대 근무를 영예롭게 마무리한 나는 2009년 초 대구 삼덕교회를 시작으로 전국 교회를 다니며 간증 집회를 했다. 지리산 자락의 산골에서 남의 집 일이나 하던 머슴으로 한평생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 기적 같은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다.
역대 경호차장 퇴직자들은 본인의 전문성과 직무능력에 적합한 정부 산하 공공기관장으로 임명되는 관례가 있었다. 나 역시 IT 및 사이버보안 분야의 전문성을 고려해 정부기관 임명 대상자로 분류돼 있었다. 그리고 재미교포가 설립한 미국 대학교의 IT학부장 영입 제의부터 정보통신 기업체의 부회장, 사립대 부총장, 방송국 대표 등 다양한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인간적 판단과 결정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했다.
2009년 7월 7일 분산서비스거부(디도스·DDoS) 공격이 발생했다. 국내 22개 주요 사이트가 공격을 받으며 국가 사이버안보에 위기가 닥쳤다. 이때 KAIST에서 전산학과 교수 청빙 제의가 왔다. 당시 KAIST에는 학생들이 만든 ‘해킹동아리’가 있을 뿐 사이버안보를 위한 연구센터나 대학원은 없었다. 2000년도에 사이버보안대학원 개설을 시도하다가 정부와 협조문제, 전문가 부족 등으로 만들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심장부인 청와대를 지켰던 나의 새로운 사명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심장부인 KAIST에서 ‘국가 사이버안보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청와대 사이버안보를 위해 수년간 현장 경험을 쌓았고, 40대에 뒤늦게 KAIST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이론적 지식을 고도화시켰다. 밤을 새우며 공부할 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포기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쓰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레마의 말씀으로 위로와 용기를 주셨다. 이 일을 맡기기 위해 마련한 준비과정이었던 것이다.
2010년 1월 1일 KAIST 전산학과 교수로 부임한 나는 먼저 ‘사이버보안연구센터’ 설립을 구상했다. 국가 정보보호 전담기관이었던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이 2009년 7월 한국인터넷진흥원(NIDA)에 통폐합된 이후 정보보호 신기술 연구개발 기능이 많이 약화됐다. 나는 먼저 청와대 정책실에 찾아가 “KAIST에 모인 학생들을 잘 가르치면 사이버보안 분야에서도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정보보호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다. 진정 IT 강국다운 사이버안보 강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신기술 연구개발과 아울러 고급인력 양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기획재정부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교육과학기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등 유관부처의 담당 국장, 차관을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그 결과 2011년 2월 ‘KAIST 사이버보안연구센터’가 문을 열었다.
그동안 섭외한 국내 최고 수준의 사이버보안 전문가들과 함께 신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얼마 후 정부 인가를 받아 ‘정보보호대학원’도 설립해 석·박사과정 학생을 모집했다. KAIST 개교 40년 동안 이루지 못한 것을 교수 부임 1년여 만에 해낸 것은 나를 사용하기 위해 그동안 준비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이자 은혜임을 고백한다.
내가 교수로 부임해 한창 일을 하고 있을 즈음, 서남표 당시 총장의 연임을 두고 KAIST의 학내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학교를 안정시키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심하던 서 총장은 500여명의 교수 중 부임 7개월밖에 안 된 나를 ‘대외부총장’으로 임명하는 강수를 두었다. 나는 한사코 거부했다. 하지만 KAIST 동문으로, 또 당시 전산학과 학생으로 공부하던 아들의 학부모로서 거부하기도 쉽지 않았다. 고심하고 또 기도했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역경의 열매] 주대준 (18) KAIST에서 ‘국가 사이버안보 파수꾼’ 되다
입력 2014-10-29 0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