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캐릭터, 그 두 얼굴에 빠지다… ‘나의 독재자’서 상반된 연기 설득력 있게 소화한 설경구

입력 2014-10-29 02:01
배우 설경구가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주인공 성근 역을 맡아 열연하는 모습. 어렵게 살아가는 무명배우이지만 자상한 아버지(왼쪽)와 김일성 대역을 맡은 이후 환상에 빠져 사는 아버지의 상반된 두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짝퉁 수령동지’ 아버지 역할의 설경구(오른쪽)와 ‘독재자 아버지’의 아들을 연기하는 박해일.
1972년 7·4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리허설을 위한 김일성 대역이 필요하다. 최고 권력기관이 주도하는 김일성 대역 오디션에 무명배우 성근이 합격한다. 성근은 동작과 표정 하나하나까지 김일성과 똑 같이 닮아가지만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정상회담이 무산된다. 그러나 성근은 20년이 넘도록 김일성의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30일 개봉되는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는 평생 동안 ‘짝퉁 수령동지’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이로 인해 인생이 꼬여버린 아들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린 영화다. 어린 아들을 둔 자상한 아버지와 김일성의 환상에 빠져 사는 아버지의 상반된 캐릭터를 배우 설경구(46)가 연기했다.

◇주인공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영화에서 설경구는 공연 전단과 포스터나 붙이는 무명 연극배우다. 어느 날 주연배우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리어왕’의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대사를 더듬는 바람에 객석에선 “대사를 까먹었나 봐”라며 수군거리고 아들 태식이 눈물을 흘리며 바라본다.

지금은 베테랑 배우가 됐지만 설경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처음으로 소극장 무대에 서 사시나무 떨 듯 긴장한 경험이 있다. 그는 최근 시사회 후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머릿속이 하얘져 빨리 끝내고 내려 가야지라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성근이 김일성 대역에 집착한 것은 아들에게 주인공 역할을 보란 듯이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온갖 시련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모습이 눈물겹다. 부자 사이의 애틋한 감정이 담긴 이 장면에서 관객들이 공감대를 갖는 것은 설경구의 실감나는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설경구는 “평소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년 전 아버지께서 저에게 전화해서 느닷없이 해준 것이 없다며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가슴 아프게 느껴져 아직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김일성 환상에 갇혀버린 아버지=설경구는 볼 살이 두둑하고 배가 큼지막하게 나온 김일성 대역을 위해 몸집을 늘렸다. 영화 ‘역도산’에서 30㎏ 가까이 찌웠던 경험이 있기에 힘든 일은 아니었다. 22년의 세월을 거치는 배역이어서 5시간 이상 분장을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김일성 역할을 위해서는 현장지도 영상을 보면서 행동 특징을 유심히 관찰했다. 똑같이 닮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비슷하다. 설경구는 “김일성의 손동작을 흉내 낸 김정은 영상도 참고했다”며 “하지만 감독이 ‘절대 김일성처럼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무턱대고 따라 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김일성을 잘 알지도 못 한다”며 “김일성 대역이어서 출연한 것이지 김일성 역할이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성근은 자신이 김일성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성근의 아들 태식(박해일 분)은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삶을 살아간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답답한 남북 관계와 부조리한 사회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갈등과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다. 설경구는 “독재자처럼 군림했지만 결국에는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127분. 15세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