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 입법예고한 법안 10개 중 3개는 법률에 규정된 예고 기간 40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예고 기간을 준수하지 않은 입법안이 전체 80%에 가까운 부처도 있었다. 말로는 국민 소통을 강조하면서 정작 새로운 법을 알리는 데는 뒷짐 지고 있는 셈이다. 유명무실해진 입법예고 규정을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시늉뿐인 입법예고, 기재부 미준수율 78%=국민일보가 법제처 홈페이지에 올라온 17개 정부부처의 올해 입법예고안 1390건(10월 21일 기준)을 분석한 결과 411건(29.6%)이 입법예고 기간 40일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법예고는 국민생활과 관련된 법령 등을 제정·개정·폐지할 경우 취지와 내용 등을 미리 공개해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제도로 40일 이상 알리도록 규정돼 있다.
기획재정부는 이 기간 입법예고한 118건 법안 중 92건(78%)이나 예고 기간을 충족하지 못해 17개 부처 중 독보적으로 많았다. 특히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취임(7월 16일)한 이후 미준수율이 무려 85.2%(54건 중 46건)에 달했다. 새 경제팀에서 굵직한 경제 정책들을 과감히 쏟아내고 있지만 충분한 의견수렴 절차는 거치지 않는 셈이다. 행정절차 관련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도 114건 중 57건으로 절반만 기간을 준수했다. 국토교통부(43건·24.9%) 보건복지부(42건·32.1%) 산업통상자원부(32건·22.1%) 교육부(25건·30.5%)가 뒤를 이었다. 해양수산부는 기간 미준수 법안이 전체 85건 중 4건(4.7%)으로 가장 적었다.
◇일부러 안 지키나…민감한 내용 수두룩=정부가 입법예고 시늉만 한 법안 중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거나 이해집단과 마찰이 우려되는 내용이 수두룩했다. 대표적인 게 서민증세 논란을 불러왔던 담뱃세 인상 관련 법안이다.
기재부, 복지부, 안행부는 지난달 12일 담배에 부과되는 국민건강증진부담금, 지방세 등을 올리고 개별소비세를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을 4일 동안만 입법예고했다. 30년 이상 된 장수 기업의 경우 원활한 가업승계를 위해 상속 공제한도를 확대하는 내용의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 개정안’ 입법예고도 4일뿐이었다.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부의 대물림 비판이 일 수 있는 법안의 예고 절차를 졸속 처리한 것이다.
안행부는 지난 8월 29일 규제개혁 등 국정과제 실적이 뛰어난 지방공무원의 근속승진 기간을 1년 단축하는 등 인사 혜택을 주는 내용의 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청와대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예고 기간은 역시 4일에 그쳤다.
규제완화와 관련된 법안의 경우 예고 기간을 줄인 경우가 특히 많아 대통령이 끝장토론까지 주재하며 독려하던 규제완화에 대해 정부부처가 얼마나 소극적으로 대처하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산업부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의 개발 자격 요건을 완화한 법안이나 국토부의 그린벨트 내 건축물 용도변경 확대 법안의 입법예고 기간도 일주일이 채 안 됐다. 이 법안은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는 환경단체의 반발이 예상됐다. 실제로 환경운동연합은 국토부가 예고 기간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국민권익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이미 언론 등을 통해 국민에게 많이 알려진 내용이었기 때문에 법제처와 협의를 거쳐 입법예고 기간을 줄인 것”이라고 해명했다.
일각에선 논란이 일 수 있는 법안이기 때문에 정부가 일부러 예고 기간을 줄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강재호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민들의 관심사이며 이해관계가 갈리는 법안의 입법예고 기간이 10일도 안 되면 그것은 정부의 ‘꼼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입법예고의 취지와도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모호한 입법예고 예외 조항 등 문제”=입법예고 기준을 명시해 놓은 행정절차법에 대한 손질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현행 행정절차법은 입법예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5가지 경우를 정해 놓았다. 예측 불가한 상황이 발생해 입법이 긴급할 경우, 상위 법령의 단순 집행, 일상생활과 무관, 단순 문구 변경, 공공에 해가 될 경우 등이다. 또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엔 법제처장과 협의해 기간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모호한 기준을 이용해 예고 기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참여연대 박근용 협동사무처장은 “입법예고 예외 조항을 너무 폭넓게 적용하는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윤태범 한국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교수는 “입법예고 기간을 줄여도 되는 ‘특별한 사정’이란 것은 예외적으로 사용돼야 하지만 현실에선 매우 비일비재하다”며 “정부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입법안을 알리는 방법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윤 교수는 “홈페이지나 관보를 통해 입법안을 알리는 것은 굉장히 소극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행태”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인터넷 포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세종=이용상 윤성민 기자 sotong203@kmib.co.kr
[유명무실한 입법예고] 10개 중 3개 ‘40일 예고’ 무시… 달랑 4일간만 알린 것도
입력 2014-10-27 03:52 수정 2014-10-27 1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