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선수(先手)를 잡는 흑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백에게 덤을 준다. 한국과 일본은 6집 반, 중국은 7집 반이 덤이다. 하지만 가로·세로 19줄, 361칸으로 돼 있는 바둑판에 반집이라는 건 없다. 반집은 무승부를 방지하기 위한 가상의 집이다. 그래서 반상에는 승패만이 존재한다.
한국기원을 통해 한종진 9단을 소개받았다. 바둑에서 9단은 입신이라고 부른다. 바둑에 대해선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96년 프로기사로 입문한 그는 올해 35세다. 그는 ‘입신’이지만 무관(無冠)이다. 2000년 제10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에서 거둔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다. 그 대회 결승전에서 둔 패착을 14년째 가슴에 안고 사는 승부사다. 아직 ‘승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패자’도 아닌, 승패의 경계선에 있는 바둑 기사를 찾았다. 그가 딱이었다. 승패 앞에서 매일 고뇌하는 승부사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한국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는 승자 독식이다. 대통령 선거든, 국회의원 선거든, 시장·도지사 선거든 한 표라도 많으면 권력을 독점한다. 표차는 중요하지 않다. 지면 그저 패자일 뿐이다. 대입이나 취업도 마찬가지다. 떨어진 자들에게 배려는 없다. 하지만 어느 사회이든 승자보다 패자가 더 많다. 승자를 위한 샴페인도 필요하지만 패자를 위한 매트리스도 없어선 안 된다.
바둑은 인생을 닮았다. 바둑 격언이 삶의 지혜를 담은 것도 이 때문이다. 욕탐불승(欲貪不勝·욕심을 부리면 이길 수 없다) 공피고아(攻彼顧我·적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나의 문제점을 돌아보라). 바둑에선 두 집을 내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생과 사다.
패착. 패배를 자초하는 결정적인 악수를 말한다. 실수와 패착은 다르다. 실수를 해도 이길 수 있지만 패착은 패배에 한해 쓰는 용어다. 한 9단은 “모든 대국에서 실수가 나온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도 악수를 둔다. 악수 뒤에는 자책과 후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가 곧 패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실수가 나왔을 때 냉정함을 잃고 악수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나온다는 것이다. 한 9단은 “복기를 해보면 첫 악수를 둔 뒤에도 판세가 여전히 좋았던 대국이 많았다”면서 “그걸 나만 몰랐다”고 털어 놓았다.
실수와 패착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미세한 희망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판세가 아무리 불리해도 이길 수 있다는 한 줄기 빛을 보고 묵묵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승리는 항상 인내와 함께 다닌다.
불계패. 승산이 전혀 없다고 판단해 돌을 던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아무리 힘든 승부에서도 아직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드시 한 번은 역전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미리 포기하는 게 가장 어리석은 거죠.” 승부사의 조언이다.
‘입신’이지만 마주 앉기만 하면 가슴이 턱 막히는 상대들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을 이긴 적도 있다. “어차피 질 때 지더라도 내 바둑을 두자고 생각했다. 물러설 것 같았던 내가 강하게 나가니 상대방이 더 놀랐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락없는 승부사다. ‘감동 없는 승리’와 ‘아름다운 패배’ 중에 하나를 골라 달라고 물었더니 “당연히 감동 없는 승리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바둑 기사들이 승리보다 좋은 기보를 남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하는 소리 같다”고도 했다.
프로기사들도 이른바 ‘꼼수’를 쓰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가끔 쓰죠”라고 답했다. 이어 “상황이 너무 불리할 때 요행을 바라며 그런 수를 두기도 하죠. 하지만 성공 확률은 거의 없어요. 그건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그는 “패배에서 더 많은 걸 배웠다”고 했다. “승리한 뒤 자만심에 빠져 슬럼프가 찾아올 때도 있어요. 하지만 혼을 쏟아부은 대국에서 패배하면 내가 부족한 부분을 절실히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하죠.”
한마디 덧붙였다. “단순히 지는 게 아니라 패배에서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바둑도장을 운영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쓰지만 우승의 꿈을 포기한 적은 없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한 달도 안 남았다. 취업 시즌도 다가온다.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삼수를 하는 조카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이 시간, 수험생이나 취업 준비생 중 자신이 공부한 것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시험이 다가올수록 불안감과 초조함은 커져 갈 것이고 ‘좀 더 열심히 준비할 걸’이라는 후회로 마음은 복잡할 것이다. 이들에게 한 9단의 말을 전한다. “지금 판세가 유리한 것을 당신만 모르고 있다”고. “참고 기다리면 역전의 기회는 반드시 한 번은 온다”고. 마지막으로 “아직 돌을 던지지 않은 게 중요하다”고.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창-하윤해] “아직 돌을 던지지 않은 게 중요하다”
입력 2014-10-25 01:00 수정 2014-10-25 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