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우울과 우울증은 어떻게 다른가 (1)

입력 2014-10-25 00:07

우울증에 대해 안 들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대해서 대충 생각하여 우울과 우울증을 구별하지 않고, 정도 차이로 생각한다. 누구나 우울을 경험하지만 누구나 우울증을 겪지는 않는다. 우울과 우울증을 구별하는 시각을 가지면 주변에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우울과 우울증의 정도 차이는 단순한 산술적 비교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런 비교가 맞으면 우리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우울한 적이 있어서 우울증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알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울과 우울증은 산술적 차이로 경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경계가 세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짐을 지면 가볍거나 무겁거나 할 테지만 그 이상의 무게인 짐을 지면 우리는 거기에 깔리고 다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강물에 조금씩 더 들어가도 물이 머리를 넘지 않는다면 물이 얕거나 깊다고 느끼겠지만 그 이상으로 깊어서 물이 머리를 넘는다면 우리는 물에 빠져 숨도 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도의 차이가 우울과 우울증의 차이인 것이다. 감히 조금 무거운 것 들어 봤거나 물에 깊이 들어가 봤다고 해서 짐에 깔리거나 물에 빠져본 심정을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진료 현장에서 이러한 차이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이다. 우울한 정도일 때에는 감정이 저하되지만 그나마 몸 상태는 정상적인 생리 기능을 유지한다. 하지만 우울증의 수준이 되면 수면, 식욕, 성욕 등 몸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정상적인 생리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고 흐트러진다. 둘째는 기존 해소법에 관한 것이다. 평소 저조한 기분을 정상화하기 위해서 사용돼 오던 나름의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우울한 시점에서는 이런 것들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우울증의 시점에서는 이런 것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평소 방법이 안 통하니 지금 국면이 평소의 우울과 다른 것이고 그러므로 다른 해소법이 필요하겠다고 인정해주길 바라는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고 “내가 써오던 방법이 안 통하니 이젠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며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우울증은 무서운 병이다.

성서에는 우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 민족도 우울이라는 정서 용어가 원래 있지는 않았다. 어원을 따라가 보면 우울이라는 감정은 고통, 무기력, 절망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애가 3장은 우울증을 강의할 때 인용하기 딱 좋은 성서이다. 1∼18절에 적혀 있는 상태는 우울증의 의학적 진단기준과 매우 흡사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후로 나오는 구절들이 의학적인 우울증의 치료와 원리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다.

19절에서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이 두 단어는 괴로움을 상징하고 있으나 우울 용어인 멜랑콜리아(melancholia)의 본래 뜻 검은(melanin) 담즙(cholic acid)에서처럼 담즙이 언급되는 게 흥미롭다. 치료의 첫째 요소는 19절의 기억과 동일한, 즉 우울을 적절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우울증은 억압, 분노, 차별, 수치 등의 본래 감정에서 도출된 이차 반응이다. 우울증의 치료는 우울의 원래 감정을 추적하는 심리치료 과정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은 마냥 편한 과정이 아니다. 이는 20절의 “내가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라는 말 그대로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설프게 직시하다가는 더 고생을 할 수 있으며 적절한 직시를 위해서 반드시 심리치료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치료의 둘째 요소는 23∼24절에 나오는 내용과 동일한, 즉 ‘규칙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적도록 하겠다. 모쪼록 교회에서 우울증을 신앙의 부족으로만 취급하지 않고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기 바란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