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8월 10일 시인 황금찬이 태어났다.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현 속초시) 갯가였다.
그해 8월 독립운동가 김구 여운형 장덕수 등이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했다. 단강(團綱)은 ‘대한독립’ ‘사회개조’ ‘세계대동’이었다. 우리 땅을 식민지 삼은 일제는 그 8월에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했다.
2014년 10월 19일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초동교회. 해방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시대를 거친 대한민국. 시인 황금찬은 이날 초동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 대예배에 참석했다. 1950년대 전쟁 직후부터 늘 해오던 대로 맨 뒷좌석에 앉아 하나님과 대면했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대시인. 그가 십자가 앞에 머리 숙인 채 한 세기의 신앙과 삶, 문학과 기독교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펜이 아닌 입술로 하나님 경배
백수(白壽)를 앞둔 시인은 헌팅캡을 눌러 쓰고 예배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장의자에 앉았다. 묵직한 조선소나무였다. 그는 입례송 ‘넓은 들에 익은 곡식’으로 찬송할 때 다른 이들과 같이 일어났으며, ‘죄의 고백’ 순서에 침묵으로 회개했다. 그렇게 공동기도, 주기도문, 교독문, 찬송 등의 예식에 함께했다.
성경봉독은 시편 126편 1∼6절과 마가복음 9장 21∼24절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시인은 펜이 아닌 입술로 하나님을 경배했다.
이어 성가대가 ‘영광송’을 불렀다. ‘황금찬 작사’라는 스크린이 제단 위에 비쳤다. 그 ‘모국어 찬양’은 맑게 불려졌으나 검버섯 핀 시인의 얼굴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시인은 손성호 목사의 설교 ‘눈물’을 경청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는 내용에 눈시울이 촉촉했다. 설교가 끝나자 시인은 안주머니에서 헌금 봉투를 꺼내 정성스러운 제물을 담았다. 느린 움직임의 예(禮)였다.
축도로 주일예배가 끝났다. 옆 자리에 앉았던 막내아들 황도원(60·소수력발전 윈드로즈 대표) 집사가 부축해 대예배당 문을 나섰다. 시인의 아내는 81년 작고했다.
초동교회 맨 뒷좌석 ‘황금찬席’
“조향록(1920∼2010) 목사님께 직분 주면 교회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그는 지금도 평신도다). 어느 날인가 아동문학 하는 친구 장로…이름이 뭐더라. 그 친구에게 ‘나는 장로 자격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 ‘나보고 하는 얘기냐’라고 농담을 했어요.”
예배 후 김영진(70·시인) 장로가 황 시인을 서울 종로1길 음식점 한일관 경복궁점으로 모신 자리에서였다. 종로2가 옛 종로서적 대각선에 있던 ‘랜드마크 한일관’은 한 세기를 버티지 못하고 헐렸다. 초동교회 교인들이 교회와 가까운 이 음식점을 자주 이용했었다. 한일관은 그 자리를 떠나 체인점이 됐다. 김 장로가 황 시인의 추억이 깃든 음식점인지라 그 체인점에 모신 것이다. 김 장로, 소재영(숭실대 명예교수) 김태정(전 동국대 국문과 교수) 박정근(대진대 교수·초동교회 문화위원장) 김옥순(성서원 대표) 전덕기(시인) 등 초동교회 문학사랑방 멤버들과의 오찬이었다. 시인은 그들의 교회 원로 선배이자 문학 스승이다. 그 제자들은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다.
문학사랑방 멤버들은 시인의 삶과 신앙을 하나라도 더 들으려 눈과 귀를 모았다. ‘한 세기의 청력’이 닫혀 가 큰 소리로 얘기해야 했다. 시성(詩聖)을 사랑하는 그들은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누구도 말을 자르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질문이 무의미했다.
“일본 항복 얘기를 나는 직접 들었어. 특별한 방송을 들은 거지. 그때(1945년 8월 15일) 양양군청에 들어가니 일본 사람들이(순사) 총과 일본 도(刀)를 세워 놓고 있었어. 풀이 죽어 있더라고. 사람들은 해방이 된 건지 아닌지 잘 몰랐지만 만세 소리가 간간이 들리기도 했지.”
그는 그 무렵 양양 산골마을 화일리 간이학교(4년제) 교사였다. 업무 관계로 군청에 들어왔다가 라디오에서 칙칙거리며 나는 ‘쇼와 천황의 항복선언 옥음방송’을 들었다. 그 산골에도 해방은 그렇게 순식간에 주어졌다.
“일본놈들이 손을 놓으니까 아무것도 없어. 가르칠 교재가 있어야지. 죄다 일본말만 써야 했고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만 공부했으니까. (양양군내) 6명의 교사가 선발되어 교과서를 집필했어. 아이들은 아예 한글을 몰라. 배운 적이 없으니까. 솔, 소나무…이런 식으로 가르쳐야 했어. 아일랜드 민요로 애국가도 가르치고(지금의 새찬송가 380장 곡에 맞춰 애국가를 불렀다). 또 소월 시도 가르쳤어. 그렇게 가르쳤더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오시더니 나더러 피하라는 거야. 공산당이 당신을 잡으려 한다면서.”
시인은 공산당 얘기를 하면서 급격히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공산당이야. 일본 제국주의보다 무서워. 여기 (모인 사람 중에) 공산당 없지!(일동 웃음)”
그렇게 해방의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바랬다. ‘38선’ 이북이었던 양양은 당시 북한이었다.
“가리방(철필을 이용한 인쇄) 긁어 밤새 교과서 만들면 그것을 군청 사람들이 자전거로 실어 날라 공부 시켰어. 그 얘기 다하면 지금도 눈물나.”
해방 이듬해. 기독교인과 지식인 등이 남쪽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공산당의 압박에 더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 유물론은 안 된다”
“양양군에 공산당을 만드는 날이었어요. 삼월초이틀이었지. 양양군 선생들을 다 모이게 했어. 한데 전부 노동복 입었어. 그중 공산당 간부인 듯한 사람이 나보고 ‘쟤는 뭐하는 애야’ 그래. 그렇게 건방져요. 공산당 세계니까. ‘(누가) 지금 당신들이 가르치는 국어교과서가 저 선생이 만든 것’이라고 하니까 ‘너 몇 살이야’라고 해요. 허허. 안하무인이야. 그리고 벽에 ‘모든 교재는 유물론에 입각해서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난 기분이 매우 나빴어요. 왜냐하면 난 기독교인이거든. 내가 발언권 달라 했어요. 내가 미쳤지(웃음). 거기가 어디라고. ‘얘기해봐’ 그러길래 ‘사람에 따라서 유심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유물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인데 유물론 가지곤 되지 않는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용달(공산당 지역책임자) 동생이 ‘야 저 쌍놈의 새끼 당장 잡아 죽여야 되겠다.’ 등에 땀이 나. 아 말을 잘못했구나. ‘(그가) 그렇지만 오늘이 너무 좋은 날이니 오늘 죽일 순 없잖나. 나가라! 보기 싫다.’ 나오는데 걸음이 안 걸려. 도재(시인의 큰아들·작고) 두 달 됐을 때예요. 새벽에 보따리에 성경책 넣어 탈출했어요.”
그는 발 크기만큼의 땅을 딛고 있으나 존재 자체가 한국 현대사 및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이었다. 모든 것을 현상해낼 만큼 기억력도 좋았다.
“여러분 공산당 잘 모르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공산당이에요.”
김 장로가 “선생님은 누굴 만나든 덕담하시는 분인데 공산주의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하시네요”라고 설명했다. 그런 세상을 탈출해 서울로 온 그는 혜화동 동성중학교에서 국어교사가 되어 시를 쓰고 교회를 섬겼다. 초동교회는 그때부터 나갔다.
시인이 좌중을 향해 말했다.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입니다. 이를 노래하는 것이 시(詩)이고요.”
백세 시인과 그의 문학 교우(敎友) 간 얘기는 그렇게 이어졌다. ‘믿음의 시인’ 한 세기는 그렇게 꽉 채워지고 있었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얼굴] 황금찬 시인 나의 시, 나의 신앙
입력 2014-10-25 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