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모멸의 세상, 존엄을 묻다

입력 2014-10-24 03:01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의 한 장면이다. 이 작품에는 나이 예순의 주인공 윌리 로먼이 나온다. 출세하지 못한 늙고 지친 남자다. 세일즈맨 로먼은 사장 하워드에게 내근직으로 이동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부탁은 자칫하면 구걸이 되고 만다. 부탁이 구걸로 변하는 순간, 존엄성은 훼손된다. 은행나무 제공
페터 비에리
“존엄하기가 가장 어려운 시대가 됐다.” 지난 주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열린 서평회에서 한 참석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잔인해지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윤일병 폭행 사망 사건과 압구정 아파트 경비원 분신 사건이 여러 차례 거론됐다.

이날 다룬 책은 사회학자 김찬호 박사가 지난 3월 출간한 ‘모멸감’(문학과지성사)이었다. 이 책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을 뜻하는 모멸감을 한국인의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경험되는 감정으로 보고, 모멸감을 키워드로 한국인의 마음과 한국 사회의 현실을 분석한다.

모멸감의 반대는 존엄성이다. 모멸은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얕잡아보면서 모욕과 경멸을 주는 것이고, 존엄은 사람 하나하나가 다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는 것이고, 돈이나 권력, 상황 등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인 페터 비에리가 쓴 에세이 ‘삶의 격’은 존엄성에 대한 책이다. 권리에 대한 책도 아니고 품위에 대한 책도 아니다. 감정을 다룬다. 그런 점에서 ‘모멸감’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모멸감과 존엄성이란 감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책에서는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가 수치와 굴욕, 무력감 등을 강요하고 있고, 감정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으며, 감정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행복이나 더 나은 삶, 성숙한 사회 같은 주제를 새로 써나갈 수도 있겠다는 메시지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오페라 극장에 갔다가 남자 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를 잠깐 바라본 적이 있다. 남자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아주 수고로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말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남자가 이렇게 대꾸하며 싱긋 웃었다.”

‘삶의 격’에 나오는 이 대목은 존엄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지만 생생한 사례라 할 만하다. 화장실 청소부라고 얕잡아 보지 않는 것, 자신이 화장실 청소를 한다고 비천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존엄한 삶은 가능하다. 문제는 누군가 얕잡아 보았을 때, 스스로 자기 삶을 부끄럽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실제로 감정을 다치지 않고 살아가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모멸감 앞에 노출돼 있다. 존엄성이란 너무나 중요하지만 너무나 취약하다. 모멸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존엄성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야 되나? ‘삶의 격’은 이런 질문들에 정성껏 답한다.

출발은 감정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 감정은 다치기 쉬운 것이고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라는 걸 인정하는 것, 그리고 감정의 상처가 육체의 상해 이상으로 파괴적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이 책은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존엄성이란 감정을 탐구한다. 존엄성 있는 삶을 위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살아라 지침을 주는 것은 이 책의 관심이 아니다. 존엄의 상실이 일어나는 지점을 세밀하게 밝히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탁월한 점이다. 그것은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일에서 소외감을 느낀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존엄의 상실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맞지 않는 일을 한다는 건 속상하고 답답한 일이지만 사람의 존엄을 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자아상에 상반되거나 정체성을 망가뜨리는 일을 해야 할 때”, 즉 할 수 없이 생체실험을 강행해야 하는 의사나 자신의 사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르쳐야 하는 교사의 경우에 존엄성은 깨진다.

저자는 또 “약점을 드러내는 것 자체는 존엄을 위협하지 않는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돈이 없다는 것은 존엄성을 훼손당할 가능성을 높인다. 독립성과 용기를 빼앗기고 예속과 두려움을 키워 자신의 말과 주장, 끝내는 신념까지 다 갉아 먹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먹을 게 없어서 당신들의 적선만 기다리고 있다마는 이건 치욕이 아니야. 그저 불행이 덮쳤을 뿐이지”라고 생각하며 존엄성을 유지하는 걸인도 있을 수 있다.

이 책이 공들이는 부분 중 하나는 존엄성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바로잡는 것이다. 살며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감정의 상처, 명백히 상대가 문제인 경우, 사회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문제 등을 마치 자신만의 문제나 일로 오해하거나 과장하기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에세이라고 하지만 분량이 450페이지가 넘고 밀도가 높다. 그렇지만 현학적인 접근법을 배제하고 문학과 영화 등에서 풍부하게 사례를 가져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해 흥미롭게 읽힌다. 감정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엄격함과 정확함을 잃지 않는 저자의 태도도 인상적이다. 문항심 옮김.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