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무한경쟁 시대에도… 1등이 아니라서 기억합니다

입력 2014-10-23 03:41
초등학생들은 6년간 달리기 꼴찌였던 친구의 손을 잡고 함께 뛰었다. ‘영원한 2인자’ 프로게이머 홍진호씨는 1인자보다 오래 사랑받고 있고, 이성우씨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만년 꼴찌 팀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응원하기 위해 지난 8월 미국에서 9박10일을 보냈다(왼쪽부터 시계방향).

'꼴찌가 뜬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등장한 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는 83년을 제외하고 85년 매각되기 전까지 꼴찌만 했다. 소설가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는 실직과 이혼으로 좌절하다 삼미의 마지막 팬클럽을 만들면서 결과와 상관없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꼴찌'는 재해석되고 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 피로해진 사람들이 꼴찌에게서 긍정과 희망을 찾고 있다.

◇꼴찌라서, 1등이 아니라서 기우는 마음=최혜선(25·여)씨는 10년째 프로야구팀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고 있다. 팀은 올해로 3년 연속 꼴찌를 했다. 실책 1위, 방어율 9위, 득점 9위. 눈물나는 올 시즌 불명예 기록에도 최씨 같은 골수팬이 많다. 최씨는 22일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1대 22로 진 지난 13일에는 마음을 비우고 경기를 지켜봤다”며 “하지만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역설적인 희망이 있다”고 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29년 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이 팀의 한국인 팬 이성우(38)씨는 요즘 ‘승리의 요정’이라 불리며 스타로 떠올랐다. 20년 팬이라는 그가 지난 8월 미국 현지에서 9박10일을 보내며 응원하는 동안 이 팀은 8승1패의 기적을 이뤘다.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왠지 꼴찌 팀에 눈길이 가서 팬이 됐다”고 말했다.

‘영원한 2인자’로 1등보다 오래 사랑받는 전직 프로게이머 홍진호(32)씨도 있다. 준우승만 22번을 했다. 조급함을 버리고 인정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홍씨의 팬을 자처하는 정모(31)씨는 “만년 2등에 키도 작고 발음도 안 좋은 자신의 여러 콤플렉스를 회피하지 않고 웃는 홍씨가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지난달엔 경기도 용인 제일초등학교의 ‘꼴찌 없는 운동회’가 관심을 끌었다(국민일보 8일자 24면 참조). 지체장애와 연골무형성증으로 초등학교 내내 달리기 꼴찌였던 6학년 김기국(12)군을 위한 친구 4명의 이벤트였다. 친구들은 경기 중 뒤처진 김군을 결승선 앞에서 기다렸다가 손을 잡고 같이 달렸다. 네티즌들은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퍼나르며 감동을 공유했다.

올 초 입사한 윤모(26·여)씨는 지난 20일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드라마 ‘미생’을 보다 눈물을 쏟았다. 미생은 바둑밖에 모르던 고졸 출신 ‘장그래’가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만화가 원작이다. 윤씨를 울린 건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직장은 결과만 대접받는 곳’ 등의 현실적인 대사였다. 그는 “나도 직장에서 무한경쟁을 겪고 한계에 부닥쳐봤다”며 “최선을 다하고, 정직하려 애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낙오자 취급받는 주인공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1등 아닌 다수의 무기력 vs 경쟁사회 패러다임의 성숙=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우리 국민 다수의 만족도는 높지 않다. 지난 6월 현대경제연구원은 스스로 저소득층이라 생각하는 중산층 비율이 54.9%나 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로 4인 가족의 월 가처분소득이 354만원, 자산 규모 2억5000만원이면 중산층에 해당하지만 한국인들은 월 500만원에 7억8000만원은 있어야 중산층이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한동대 심리학과 신성만 교수는 꼴찌에게 공감하는 자세에 대해 “숨 쉴 공간 없는 성공지상주의에 지친 현대인이 생계와 무관한 스포츠나 대중문화에서만이라도 한발 물러서고 싶어 하는 일종의 반작용”이라고 분석했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에게 동정표가 몰리는 ‘언더독(underdog) 효과’와 비슷하다는 설명이다. 또 “사회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없다는 무기력에 빠지면 손쉬운 기여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며 “못하는 팀을 응원해 승리하면 성취감을 느끼는 심리”라고도 봤다.

문학평론가인 한양대 이재복 교수는 “과도한 경쟁에 지친 사회에서 사람들이 좌절감과 패배의식을 넘어 삶의 본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며 “승패, 우열, 갑을로 표현되는 ‘격차’를 보고 자기연민에 빠질 게 아니라 이런 꼴찌들을 통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는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