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안전불감증-(3·끝) 전문가 진단] “전시성 규정만으론 반복되는 대형참사 못 막는다”

입력 2014-10-23 02:41
안전사회시민연대 회원들이 22일 오전 서울 정동 대한문 앞에서 ‘환풍구 높이를 5m 이상 올리라’는 내용의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안전 규정을 마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연합뉴스

전문가들은 반복되는 대형 참사를 예방하려면 안전기준이 각 분야에 구체적으로 녹아들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민의 안전과 동떨어진 ‘전시성 규정’으로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안전불감증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지난 17일 발생한 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구 추락사고에서도 안전요원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공연 현장을 통제하지 못했다.

‘관(官) 주도의 안전’에서 벗어나 안전한 문화를 만들 수 있는 민·관의 소통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안전 규정만으로는 뿌리 깊은 안전불감증을 해소할 수 없어 시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진단이다.

◇실효성 없는 규정이 안전불감증 키운다=경남과학기술대 토목공학과 이석배 교수는 22일 “판교 참사는 건물의 환풍구 덮개에 사람이 올라가서 무게를 못 이겨 사고가 난 것”이라며 “추락 위험이 예상된다면 중간에 안전장치를 한다든지 환풍구 덮개 중간에 보라도 하나 댔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런 기준이 설계기준에 들어가 있지 않고 시공한 사람은 설계에 있는 대로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청운대 건축설비소방학과 최윤철 교수는 “환풍구에 대한 건축기준이 없거나 애매하다”며 “지상에 돌출돼 있어서 그것을 지붕으로 봐야 하는지, 만약 지붕으로 본다면 어떤 하중에 맞춰 설치해야 하는지 등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사후관리에 좀 더 무게를 둬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현준 화재안전센터 선임연구위원은 “시설을 제대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후관리나 유지관리가 안 되고 있다”며 “모든 것이 관 주도로 이뤄지지만 관리 인력이 부족해 사후관리를 못하는 측면도 크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차원에서 논의되는 안전기준은 최고가 아니라 최소 이 정도 이상은 돼야 한다는 건데 그것만 지키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규정을 목적에 맞게끔 세부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사소한 위험까지 고려하는 상상력 키워야=강원대 소방방재학부 백민호 교수는 “올해 발생한 대형 참사의 특징 중 하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점”이라면서 “야외공연장 같이 지극히 평범한 장소가 참사 현장이 된 것은 환풍구를 사소한 위험요소라며 그냥 흘려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생활 속의 안전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전문인력을 배치하고 일반인이 안전수칙을 수용하는 과정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위험요소라도 한 번 더 고려하는 감독 기능을 강화하고, 현장에 있는 다수의 시민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전불감증을 개선할 수 있는 의식개혁 운동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안전규정을 지키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경쟁적 상황’에 내몰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대 사회학과 정근식 교수는 “세월호 참사를 겪었지만 경쟁과 몰아치는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며 “자본주의적 속도의 문제와 개인의 심성은 그대로”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들어 상식과 성찰의 문화보다 경제위기와 경제우선주의를 중시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며 “안전 문제를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문화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상진 황인호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