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대준 (14) 승리의 하나님 “이번에는 청와대에 도전하라”

입력 2014-10-23 02:30
주대준 KAIST 교수(오른쪽 두 번째)가 1989년 8월 청와대 전산프로그램개발팀장에 뽑힌 뒤 동료들과 환송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귀국 후 몇 개월 동안은 육군본부의 분위기와 새로운 근무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더구나 2년간의 공백을 만회하려고 주변과 어울리다 보니 일탈이 계속됐다. 이러한 나를 정상 궤도로 돌아오게 한 계기는 평신도 성경학교다. 영적으로 갈급했던 나는 성경학교와 성경대학원에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날마다 생수 같은 말씀을 먹었다. 이후 생기가 솟아 새로운 비전을 꿈꾸게 됐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2년이 지나면 박사과정 유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다시 박사과정 유학을 준비했다. 앞으로 국방부를 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전산 전문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노력해 1989년 미국 박사과정 위탁교육에 응시했다. 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육군본부에서 주요 보직을 맡아 왔다. 게다가 전산처장의 보좌관까지 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박사과정 합격자 0순위였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심사 기준과 과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유학을 막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불합격할 이유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다시 기도의 불이 붙어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로 제단을 쌓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만 따라가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아내가 “이럴 수가 있느냐. 주변에서 모두들 합격이라고 했는데 무슨 사유로 불합격됐느냐”고 아쉬워할 때도 나는 아내를 위로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자고 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가면 미국이든 한국이든 언제고 박사과정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몇 개월이 지나고 어느 날, 청와대에서 전산실을 만들어 ‘전산프로그램개발팀장’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라고 탄성을 질렀다. 지난 몇 달 동안 새벽마다 남몰래 부르짖으며 “하나님, 그토록 갈구하며 준비한 박사과정 유학길을 막은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했는데 바로 이거였구나 싶었다. 하나님은 내가 10년 전 청와대를 보며 ‘언젠가 청와대 안에 전산실이 창설되면 제가 저곳에서 근무하게 해 주세요’라고 한 기도에 응답하시려고 미국 유학길을 막으신 것이다. 나는 곧바로 ‘저 자리는 나를 위한 자리’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준비했다.

그러나 청와대라는 상징성 때문인지 지원자들이 만만치 않았다. 국내외에서 전산 석사학위를 취득한 우수 전문가들이 대거 지원했다. 나는 전산처장에게 청와대 전산프로그램개발팀장에 응시하겠다고 보고했다. 전산처장은 육군 전산장교 중 지원 대상자를 모두 보고받은 후 내가 합격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지원 의사를 밝히자 거부하지 못하고 그가 한 첫 말은 “그래. 이 기회 아니면 언제 청와대 구경 한번 하겠나. 부담 없이 청와대 구경이나 잘 하고 와”였다.

전산처장뿐 아니라 주대준이 합격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육군본부 간부 중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지원자 대부분이 육군사관학교 출신이거나 학생군사교육단 출신이었다. 3사관학교 출신은 내가 유일했다. 그때만 해도 청와대에 선발되는 군인은 대부분이 육사 출신이어서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청와대 전산실을 만들었고, 이 자리는 내 자리라는 믿음에 변함이 없었다. 냉정하게 돌아봐도 내가 선발돼 청와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지원자들은 사전 심사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다섯 명이 청와대에서 면접시험을 봤다. 선발 심사위원장은 경호차장이, 심사위원은 각 처장들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이 청와대의 위압감에 눌려 제대로 답을 못할 때 나는 마치 방언이 튀어나오듯 자신 있게 답했다. 그 자리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당당했다. ‘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결과를 기다렸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