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속으로 떠나는 여로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군사분계선이 지척인 황금들판을 달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평화누리길로 들어서면 임진강 코스모스 꽃길이 정겹다. 물억새와 강돌이 오후의 햇살을 황금색으로 튕겨내는 강변에 내려서는 순간 여인의 주름치마를 닮은 거대한 적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용암이 흐르던 그날을 반추하듯 담쟁이덩굴로 붉게 단장한 동이리 주상절리가 임진강 수면에 나르시스처럼 제 모습을 비추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직선거리로 60㎞ 떨어진 경기도 연천은 하루 종일 포성이 멈추지 않는 긴장의 땅이다. 최근에는 대북 전단을 실은 풍선을 향해 북한군이 고사포를 발사해 남북 간에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마을보다 군부대가 많고 민간인보다 군인이 더 많아 보이는 군사도시지만 ‘한반도의 지질교과서’로 불리는 연천의 속살은 곱게 단장한 단풍과 어우러져 더욱 신비롭다.
한반도의 지질교과서는 한탄강과 임진강 강줄기를 따라 펼쳐진다. 한탄강 최고의 명소는 연천읍 고문리에 위치한 재인폭포. 30만년 전에 형성된 용암 덩어리가 풍화와 침식을 거쳐 형성된 재인폭포는 여느 폭포와 달리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절벽으로 돌출된 바닥이 투명한 전망대 아래로 18m 높이의 폭포와 폭포를 둘러싼 반원형의 검은 석벽이 블랙홀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한 재인(才人)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재인폭포는 동남아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비취색 소(沼)가 검은 석벽과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갈수기인 가을에는 폭포는 물론 바닥까지 바싹 말라붙는다. 덕분에 철계단을 내려가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검은 석벽을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다.
지구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듯 철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 폭포 바닥에 서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수십억년 시간의 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절벽과 위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동굴, 그리고 균열로 인해 언제 분리돼 떨어질지 모르는 주상절리의 돌기둥들이 영화 속의 외계 행성처럼 생경하다. 여기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절벽 위에 뿌리를 내린 색색의 단풍과 이따금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단풍잎이 어우러져 황홀경을 더한다.
재인폭포를 출발한 한탄강은 전곡리에서 구석기 유적지를 만난다. 30만년 전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대륙을 횡단하던 호모 에렉투스는 한탄강 근처 전곡에 삶의 터전을 잡는다.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사용한 최초의 인류로 그들은 한탄강에 굴러다니는 단단한 강돌을 깨고 다듬어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땅을 파서 나무뿌리를 캐는 다목적용 석기로 사용했다.
구석기시대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맥가이버 칼’에 비유되는 주먹도끼가 전곡리에서 발견된 것은 우연이었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미군병사 보웬은 1978년 봄 한탄강변을 거닐다 주먹도끼를 발견했다. 손에 쥐기 좋도록 형태를 다듬고 좌우대칭을 이룬 주먹도끼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제외한 어떤 지역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아슐리안형이었다. 이 발견은 고고학계의 정설을 뒤집는 획기적 사건으로 연천 전곡을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지로 자리매김했다.
구석기 유물 발굴현장을 보존한 전곡리토층전시관과 전곡선사박물관이 위치한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구석기축제가 열리는 현장이자 어린이들의 현장학습 체험장. 억새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드넓은 잔디밭에는 구석기인들이 살던 움막 등이 재현되어 있고, 사냥을 하는 구석기인 조각 등이 설치되어 있다. 무심코 가을볕을 즐기다 맞닥뜨리는 구석기인 조각으로 인해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만년 전으로 여행을 온 즐거운 착각에 빠지는 것은 연천 지질여행의 덤.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물돌이동처럼 한 바퀴 휘감은 한탄강은 미산면 동이리에서 임진강을 만난다. 그리고 용암과 시간으로 빚은 마지막 걸작을 완성한다. 동이리 앞 임진강 동쪽 강변에 길이 1.5㎞, 높이 45m의 깎아지른 절벽인 동이리 주상절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동이리 주상절리는 한탄강을 흐르던 용암이 임진강을 만나 병목현상을 일으키면서 상류 쪽으로 밀려올라가 만들어진 희귀한 사례이다.
동이리 주상절리로 가는 길은 가을이 한창이다. 전곡에서 임진교를 건너 미산면에 들어서면 추수를 앞둔 황금들판이 펼쳐진다. 황금들판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버드나무 한 그루가 멋스러운 농로를 달려 임진강 둑길에 들어서면 코스모스 꽃길과 완공을 앞둔 거대한 교량이 이정표 역할을 자처한다.
하얀 물억새꽃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동글동글한 강돌이 드넓게 펼쳐진 임진강변은 동이리 주상절리가 극적으로 보이는 포토 포인트이다. 절벽 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나날이 단풍이 화려해지고 주상절리의 거친 표면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은 불이라도 난 듯 활활 타오른다.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웅장하면서도 조형미가 뛰어난 동이리 주상절리. 이 신비한 조각 작품은 지구가 한탄강과 임진강이 흐르는 연천에 준 소중한 선물이다.
연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용암과 시간이 빚었구나 임진강의 ‘오색 속살’
입력 2014-10-23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