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참사에도 선진 시민의식 보여준 판교 유족들

입력 2014-10-22 02:15
가을비가 내린 21일 경기도 분당제생병원과 성남중앙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는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로 숨진 9명의 영결식이 각각 엄수됐다. 삼남매를 남기고 떠난 40대 부부와 기러기 아빠, 40대 회사원 등등. 청천벽력과도 같은 참사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어버린 유족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로써 희생자 16명의 장례가 모두 마무리됐다.

대형 인명 사고임에도 이처럼 장례가 조용하고 신속하게 치러진 것은 이례적이다.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유족들과 과실 주체들 간에 보상금액 등을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외부세력까지 개입해 장기화되면서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무엇보다 유족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유족들은 사고 직후 “세월호 사고가 있는데 또다시 이슈화하지 않겠다”며 합동분향소를 차리지 않았다. 그런 의지는 사고 발생 57시간 만에 사고대책본부와의 합의 도출로 재확인됐다.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유족들은 보상 문제를 합리적인 선에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유족들은 판교 사고가 악의나 고의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닌 만큼 관련 당사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최소화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안전요원을 배치하지 않는 등 행사 주최 측의 안전불감증이 확인됐으나 분노를 표출하기는커녕 선처를 당부한 것이다. 부상자들도 인정한 것처럼 희생자들의 과실이 일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유족들의 차분한 대응과 대승적 결단은 충분히 본받을 만하다고 하겠다.

사고대책본부의 발 빠른 조치도 한몫했다. 행사를 주관한 이데일리와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은 한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곧바로 진정성을 갖고 정부·지자체와 함께 수습에 앞장서 합의를 앞당길 수 있었다. 유족들이 서운함을 갖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성의를 다해야 한다. 아울러 부상자 가족들과의 협의에도 만전을 기하길 바란다.

유족들의 결단이 빛을 발하려면 안전한 국가를 만드는 데 모두가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우선 경찰은 판교 행사의 집행 과정, 환풍구 덮개의 부실시공 여부 등을 낱낱이 파헤쳐 법을 어긴 경우가 드러나면 일벌백계해야 한다. 정치권의 정략적 공방은 볼썽사납다. 대통령이 잘못해 판교 사고가 일어났다고 억지 부리는 야당이나 성남시장이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여당이나 오십보백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