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용기를 가지고 꿋꿋이 살아가겠습니다. 이 사고가 악의나 고의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닌 점을 고려해 관련 당사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최소화되기를 희망합니다.”
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구 추락 사고로 숨진 희생자 16명의 유가족 협의체 대표를 맡고 있는 한재창씨는 20일 성남시 분당구청 사고대책본부 브리핑실에서 사고대책본부와 밤새 협상 끝에 마련된 보상 등에 관한 합의안을 밝히며 머리 숙여 인사했다. 유족들은 사고 발생 57시간 만인 20일 새벽 3시20분 합의안에 서명했다. 대형 사고로 인한 보상 문제와 관련한 합의가 이처럼 빨리 이뤄진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고 합리적인 선에서 판단한 유족들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배상금액을 통상적인 판례에 따라 기준을 정하고 액수는 나중에 확정하는 식으로 협상에 임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각종 대형 사고의 피해 유족들은 배상 금액을 정해놓고 과실 주체 등과 비교적 긴 협상 끝에 합의에 이르렀지만 이들은 달랐다. 협상 과정에서 심각하게 쟁점이 되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유족들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보상 문제에 관해 통상적이고 합리적인 선에서 합의하는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사고를 불러일으킨 행사를 주관한 이데일리와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이 책임 있는 자세로 합의에 임했다며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합의 내용은 원칙적으로 공개하지 않기로 했으나 장례비용의 경우 희생자 1명당 2500만원을 일괄 지급하기로 했다. 희생자 전원에 대한 장례절차도 확정됐다.
경기도 성남시 중앙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에서는 이번 사고의 희생자인 김모(27·여)씨의 영결식이 진행됐다. 유족들은 차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서울·경기지역 병원 장례식장 4곳에서는 김씨 외 희생자 5명의 발인이 엄수됐다. 나머지 희생자들은 21일 모두 진행하는 것으로 확정됐다.
사고 현장에 안전요원이 한 명도 배치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전불감증에 따른 인재로 밝혀졌지만 유족들은 누구를 원망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관련 당사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최소화되기를 바란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유가족들은 슬픔과 분노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다수 유가족들의 반대로 합동분향소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번 사고의 책임과 보상 문제 등을 둘러싸고 또 다른 쟁점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물론 희생자들 모두가 성인인 데다 본인 과실도 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가족들의 이러한 태도는 성숙한 시민의식의 발로라는 것이 전문가들 견해다. 사고 발생 직후 구성된 사고대책본부와 경찰수사본부가 발 빠르고 성의 있게 움직인 것도 유가족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숙명여대 경영학부 정동일 교수는 “기본적으로 세월호 이후 학습효과가 있었다”면서 “정부 당국이나 지자체 등이 사고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고, 유가족들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관련기사 2·3면
성남=강희청 기자 kanghc@kmib.co.kr
[판교 환풍구 추락참사] “슬프지만 가슴에…” 성숙한 유가족
입력 2014-10-21 03:31 수정 2014-10-21 1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