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승효상(63)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서울시 총괄건축가’란 낯선 이름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건축을 일반인들이 관심 갖는 장르로 만드는 데 앞장서 온 그를 지난 7일 저녁 서울 동숭동 건축사사무소 이로재(履露齋)에서 만났다. 총괄건축가로서 첫 출근을 하고 막 퇴근했다고 했다, 이로재는 ‘이슬을 밟는 집’이란 뜻이다. 소학(小學)에 나오는 말로 늙은 부모를 모시는 가난한 선비가 문안을 드리기 위해 새벽이슬을 밟는 집이란 의미다. 지하 1층 사무실 한쪽에는 1000여권이 넘는 책이 분류표에 따라 꽂혀 있는 서재가 있었다. 검도 3단임을 입증하듯 책상 뒤편에는 죽도 10여 자루가 놓였다. 나지막한 클래식을 들으며 서울의 건축과 그의 건축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승효상은 소위 스타 건축가다. 대중 앞에 자주 나서고 사회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2009년 조성된 광화문광장을 중앙분리대에 불과하다고 했고, 청계천 복원에 대해서는 ‘반생태적 복원’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고 그가 연예인처럼 관심과 인기만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건축에 새바람을 몰고 온 ‘4·3그룹’ 결성에 주도적이었고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역설하는 데 앞장섰다.
승효상은 늘 건축의 최고 가치는 공공성이며 건축주는 소유권이 아니라 사용권을 가졌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서울의 건축은 확장과 성장을 상징하는 ‘메가시티’가 아니라 연계와 연대를 중심으로 한 도시, 즉 ‘성찰적 도시’란 의미가 담긴 ‘메타시티’로 전환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수졸당(93년) 수백당(98년) 웰콤시티(2000년) 등으로 한국건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했고 1997∼2007년 파주출판도시 코디네이터, 2011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냈다. 2002년 건축가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2007년 대한민국예술문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용산미군기지 공원화 사업 마스터플랜 등 다수의 작품을 맡고 있다. 서울대 건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 북런던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서울대와 고려대에 출강했다.
-처음 듣는 공직이다. 총괄건축가란 뭘 하는 자리인가.
“서울시에서 이뤄지는 모든 건축물에 대해 시장에게 자문역할을 한다. 2년 임기로 주 2일 근무하는 시장 직속 비상근직이다. 영어로는 ‘시티 아키텍트(City Architect)’라고 한다. 건축이 앞선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에는 이미 오래전에 생겼다. 네덜란드 같은 나라는 국가 총괄건축가(State Architect)도 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총괄건축가가 시장과 함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서울시에는 건축설계 분야와 연관된 부서만도 20여개가 있다. 1000만 시민들 대상으로 하는 건축 프로젝트는 종류도 많고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대부분 부서별로 기획, 집행되는 경우가 많아 공공 프로젝트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축소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 해당 부서 간 협업과 조율을 책임지는 일을 한다. 2012년 박원순 시장 취임 때부터 2년간 서울시 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제2부시장 산하여서 시 전체의 건축에 공공성을 부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우선 역점을 둘 부문은.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이어 현재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조율해볼 생각이다. 새롭게 추진할 일의 방향은 서울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운상가 리모델링과 끊겨진 한양도성 성벽을 잇는 일 등이다. 세운상가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브리지가 있는 등 60년대 당시 세계 최초로 입체 도시를 현실화했다.”
서울역 고가를 사람이 걷는 하늘공원으로 만들고 종묘와 청계천, 을지로, 남산을 잇는 보도를 통해 한강에서 걸어서 북악산까지 갈 수 있게 만드는 프로젝트도 그의 관심 사안이다. 그러나 서울역 고가 하늘공원은 영업권 위축을 내세우며 남대문 시장 상인들이 거세게 반대하고 있어 총괄건축가로서의 그의 행보가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현재 서울의 건축은 어떤가.
“개별 건물 하나하나는 선진 도시에 못지않지만 전체적으로 봐서는 부조화를 이룬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건축을 하는 사람 대다수 공통으로 느끼고 있다. 흔히 유럽 건축물의 경우 ‘그림 같다’고 한다. 이는 건축물에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울 건축다운 정체성을 갖는 건축물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승효상’이라고 하면 스승 ‘김수근’과 그의 건축설계사무소인 ‘공간’이 따라붙는데.
“어쩔 수 없다. 그의 제자라는 사실은 숙명이다.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건축가가 돼야 한다는 게 과제 중 하나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젊은 친구들이 김수근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가 남긴 작품이 너무 쉽게 없어져 아쉽다. 옛 한국일보 사옥, 명륜동 우석병원도 그렇고 장충동 자유센터는 황칠을 해서 엉망진창이 됐다. 한국 현대건축을 나타내는 자산이 될 텐데 안타깝다.”
-‘공간’에서 나와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갔다. 무슨 공부를 했나.
“빈 공대에 입학했다. 빈에서의 생활은 2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돌프 로스(1870∼1933)를 배우면서 ‘건축으로도 혁명이 가능하겠구나’라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 돌아왔다. 그가 활동할 당시 빈은 물론 유럽의 건물은 모두 장식이 화려했다. 로스는 왕궁 앞이자 빈 도심인 미하엘 광장에 간단한 박스형 건물을 지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건축에 완전히 반하는 아주 모던한 형식이었다. 빈 시민들이 시위까지 하는 등 비난이 끊이지 않자 그는 심포지엄을 열어 ‘장식은 죄악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합리주의적 현대 모더니즘 건축에 불을 붙인 셈이다. 이 논쟁 이후 건축물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사회가 변했고 마침내 세상도 새로워졌다. 결국 건축이 혁명을 한 셈이었다. ‘로스 하우스’로 명명된 이 건축물을 두고 당대의 작가 카를 크라우스는 ‘건물을 세운 것이 아니라 철학을 세웠다’라고까지 하지 않았나. 사실 그 전에는 건축이 뭔지 제대로 몰랐다.”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를 설계했다는데.
“경동교회 프로젝트는 (김수근) 선생님의 제자로 참여했으나 사실상 내가 설계를 도맡았다. 준공되지 않은 상태로 유학을 가 82년 귀국 후 다시 찾았다. 25세 때 맡은 내 첫 작품이자 ‘공간’의 이름을 크게 알린 마산성당(1977년) 설계 당시 부족했던 부분을 반성도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당시 강원룡 목사님과 디테일을 두고 의견 충돌도 적지 않았다(웃음). 특히 교회 지붕 위의 열린 공간인 ‘스카이 처치(옥상 교회)’를 두고 이견이 많았다. 에피소드 하나 얘기해도 되나. 2012년 경동교회 30주년 기념강사로 초빙돼 가서 ‘여해기념관’이 된 그 공간을 옥상교회로 복원해 줄 것을 강 목사님 아드님에게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노력하겠다고 하시더라(웃음).”
-원래 신학을 하려 했다는데.
“부모님이 종교 박해를 피해 월남하셨고, 아버님은 피란지 부산에서 교회를 세우다시피할 만큼 독실한 장로님이었다. 여섯 살 많은 누나는 은퇴 후인 지금도 인도에 파송된 선교사다. 그런 분위기였던 만큼 신학을 할 생각이었으나 어머님이 반대하셨다. 아주 독실하셨음에도 승씨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된다는 피란민이 갖는 절박함 때문이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동숭교회 장로다.”
-‘공간’에서 언제 독립했나.
“빈에서 돌아온 후 (김수근) 선생님과 한번 대적해보겠다는 건방진 생각으로 다시 ‘공간’에 들어갔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그러다 선생님이 86년 55세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마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가 없는 ‘공간’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나오려고 했으나 돌아가시기 전 선배와 함께 사무소를 맡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는 바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빚 30억원도 남겨 주셨다. 막막했다. 지금으로 치면 한 300억원 안 되겠나. 사채업자, 은행, 노동부 등 온갖 곳에 빌고 또 빌고 하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 많이 싸우기도 했다. 이후 4년 동안 대충 빚을 청산하고 선배에게 사정사정해 독립하게 됐다. 그때가 89년 12월 27일이다.”
-이로재란 이름을 어떻게 짓게 됐나.
“친구인 유홍준 교수에게 부모님과 함께 살 집(수졸당)을 설계해 줬는데 그때는 그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기 전이라 형편이 어려워 설계비도 제대로 없었다. 그런데 그의 방에 괜찮아 보이는 현판이 있어 탐을 냈더니 가져가라고 하더라. 그때 설계비 대신 받은 현판의 글씨가 이로재다. 유 교수 말로는 한 200년쯤 됐으며 추사 제자인 이삼만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하더라. 언젠가 시민단체 기부 행사를 위해 경매가를 알아봤더니 몇 천만원은 족히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건축사무소 이로재의 정신은 뭔가.
“김수근 휘하에서 15년을 있다 보니 내 건축이 없었다. 고민도 많이 했고 흔들린 적도 많았다. 그러다 90년 4월 3일 이른바 ‘4·3그룹’을 만들면서 내 건축을 찾기 시작했다. 30, 40대 독립건축가들이 학연에 얽매이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건축 방향을 모색하는 모임이었다. 이를 통해 90년 도 건축을 관통하는 철학인 ‘빈자의 미학’을 발표하게 됐다.”
-‘빈자의 미학’은 승효상 건축의 고유명사가 됐다. 무슨 의미인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한 미학이다. 한마디로 절제와 검박의 아름다움이다. 본질적으로 돈 있는 사람들의 영역인 건축에서 ‘가졌음에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정신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더 높이 지을 수 있지만 좀 낮추고, 채울 수 있지만 비우고 그러면서 길과 길 사이를 뚫어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하는 그런 건축물을 구상하는 것이다. 가짐보다 쓰임이, 더함보다는 나눔이,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 중요하다는 말로 요약되는 나의 ‘건축학 개론’이다. 대학로 샘터 사옥 1층을 보면 비어 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대학로 뒷길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하기도 한다. 공간을 시민에게 내 주는 것 그것 때문에 남은 장소가 돋보이는 것, 건축에서 공공적 가치를 키우는 것이 빈자의 미학의 핵심이다.”
-봉하마을 묘역 설계는 경남고 동기 문재인 의원 부탁이었나.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
“아니다. 유족의 의뢰를 받은 유홍준 교수가 ‘작은비석조성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내게 부탁했다. 나는 고인을 항상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내모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 하버드대 교수였던 팔레스타인계 문화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지식인의 정의에 부합한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노무현은 내 생각과 부합하는 자발적 추방인이자 지식인이었다.”
승효상은 그의 책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에서 노 전 대통령 묘역은 유 교수가 당시 기자회견서 얘기한 대로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를 바탕에 두고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정치적 부담은 없었나. 혹 정치에 관심 있나.
“중요한 정부 일이 좀 안 오는 것 같긴 하다(웃음). 정치를 하자는 제안이 잘 오지도 않지만 오더라도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잘할 수 없는 일이다. 앞서 말했지만 건축으로도 혁명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어울리지 않는 정치를 할 필요가 있나.”
-글 잘 쓰는 건축가로도 유명하다.
“과찬이다. 글과 설계는 비슷하다. 글쓰기가 글이란 도구를 이용해 자신의 개념을 세우고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창의적 작업이란 측면에서 건축과 비슷하다. 글이 반드시 이해돼야 되듯이 건축도 무조건 설명이 돼야 된다. 왜 이 설계를 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글쓰기와 비슷한 과정이다.”
-건축학도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건축은 남의 집을 설계하는 것이다. 자신을 타자화, 객관화해 사물을 보는 훈련을 해야 된다. 집터에 가보면 터 자체가 ‘나는 어떤 집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선 그 말을 들어야 되고 그러기 위한 엄청난 리서치를 해야 된다.”
-좋은 집이란, 좋은 건축이란 뭔가.
“조금 불편한 집이다.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터무늬’가 있는 집이다. ‘즐겁게 불편한 집’을 생각하면 된다, 좋은 건축이란 건축물 속에서 사람이 가장 잘 보이는, 약간 거칠고 검박하지만 우리 생각을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jyjung@kmib.co.kr
[인人터뷰] ‘서울시 총괄건축가’란 이름으로 대중 앞에 선 승효상
입력 2014-10-22 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