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안전불감증이 작용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사소한 부주의로 소중한 열여섯 목숨을 잃었다. 꼭 20년 전의 성수대교 붕괴부터 지난주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까지 참사는 쉼 없이 되풀이됐고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안전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안전사회'로 가는 길을 도대체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안전한 시스템'이란 게 가능하긴 한 것일까. 이런 물음 앞에서 국민일보는 시민의식에 주목해 보기로 했다. 나의 안전은 정부가, 사회가, 시스템이 챙겨주기 전에 어쩌면 내가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수준의 안전의식을 갖고 있는지 점검하는 '우리 안의 안전불감증'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싣는다.
시작은 단 한 명의 종종걸음이었다. 20일 오전 8시 서울 지하철 4호선 미아역 인근의 버스중앙차로 정류장. 버스에서 내린 출근길 시민 10여명이 정류장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한 명은 이들과 멀찍이 떨어져 정류장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횡단보도가 없는 차도를 흘낏거리더니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편도 2차로를 무단 횡단했다. 그를 본 횡단보도 앞 시민들은 우르르 자리를 옮겨 그가 한 대로 무단횡단을 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나다. 횡단보도로 건너는 것보다 무단횡단을 하는 편이 지하철역에 더 빨리 도착한다. 채 5분도 안 되는 시간과 안전을 맞바꾼 것이다. 한 시민은 “잘못이란 건 알지만 횡단보도로 가면 지하철역까지 너무 멀리 돌아간다”고 말한 뒤 황급히 자리를 떴다.
같은 날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인근의 버스중앙차로 정류장도 마찬가지였다. 버스에서 내린 이들은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차들을 피해 도로를 건넜다. 안내 표지판과 난간 등에 가려 달려오는 차가 잘 안 보이는 상황인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판교테크노밸리 환풍구 참사는 허술한 안전시스템과 함께 시민의 부족한 안전의식이 빚어냈다. ‘잠깐이니 괜찮겠지’란 사소한 부주의가 사고를 부르고 그 결과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올 1∼4월 서울의 교통사고 사망 보행자 71명 중 41명은 무단횡단을 하다 숨졌다. 한 달에 10명꼴로 무단횡단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잠깐의 편리함과 평생의 안전을 맞바꾸고 있다.
이날 오전 서울 서대문구 국민권익위원회 맞은편 버스정류장. 한꺼번에 시내버스 5대가 몰려들더니 맨 뒤에 있던 버스가 갑자기 차선을 바꿔 급출발했다. 정류장에 태울 승객이 없다고 판단해 앞에 선 버스들을 앞질러 간 것이다. 그때 30대 남성이 이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 앞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들면서 버스에 치일 뻔했다. 다른 버스들까지 일제히 경적을 울렸고 승객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성급한 버스와 다급한 승객이 각각 자기 생각만 한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등 운전 중 한눈을 팔다 일어나는 주시태만 교통사고도 급증했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전방주시태만 사고는 2004∼2010년 연평균 353건에서 스마트폰이 본격 보급된 2011∼2013년 연평균 721건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
지하철역이나 백화점 등의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사소한 부주의가 사고를 낳는다.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구 백화점을 찾은 최모(29)씨는 상향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칸 아래 서 있는 여자친구를 향해 선 채로 올라가다 턱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가 중심을 잡지 못했다면 아래쪽에 있던 많은 쇼핑객이 한꺼번에 넘어질 상황이었다.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은 지난 5년간 발생한 에스컬레이터 사고 432건 중 400건(92.5%)이 이용자 과실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관리원 사고조사처 이병주 차장은 “손잡이를 잡지 않거나, 안전선 밖으로 발을 내놓거나, 옷이 끼어 발생하는 사고가 많다. ‘이쯤이야’ 하다가 대형 사고가 난다”고 말했다.
경남과학기술대 토목공학과 이석배 교수는 “안전시스템을 갖추는 노력과 함께 안전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란 시민의식이 맞물려야 안전 사회로 갈 수 있다”며 “안전한 사회를 위해 조금씩 생각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우리 안의 안전불감증-(1) 사소한 부주의가 사고 키운다] 무단횡단 사망, 서울에서만 한 달에 10명꼴
입력 2014-10-21 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