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돋친 듯 풀려나간 5만원권이 한국은행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50만원·30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 발행이 급격히 늘어난다. 그러나 이들 고액 화폐와 상품권은 현금 거래의 특성상 어떤 경로로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 길이 없다. 박근혜정부는 증세 없는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지하경제 양성화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지하경제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고액 상품권 급증=지난달 혼수 물품을 장만하러 백화점에 들른 김경득(32)씨는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매장 직원은 “현금으로 결제하면 15% 할인된 금액을 상품권으로 돌려주겠다”고 권유했다. 구매 금액에 따라 결제와 동시에 상품권을 주겠다며 매장 직원은 30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흔들어 보였다. 대신 현금 영수증 발행은 해주지 않는다는 게 매장의 조건이었다. 잠깐 망설였던 김씨는 현금 구매를 선택했다. 현금 영수증을 발행하고 얻을 연말정산 환급금보다 매장이 제시하는 할인 폭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김씨 개인으로선 현명한 소비였는지 모르지만 엄연한 탈세의 현장이다.
한국조폐공사는 지난해 발행한 상품권이 모두 2억6000만장, 금액으로는 8조3000억원에 이른다고 20일 밝혔다. 금액으로는 전년보다 33.1% 늘어난 것이다. 백화점 등은 위·변조 방지를 위해 화폐 제조 기술을 보유한 조폐공사에 상품권 발행을 위탁한다. 조폐공사를 통해 공급되지 않는 일부 상품권을 포함하면 전체 상품권 시장은 약 11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액면가 30만원 상품권은 지난해 112만6000장이 발행돼 전년 대비 62% 증가했다. 50만원 상품권은 132% 늘어난 365만장이 발행됐다. 백화점·대형마트 상품권이 전체 상품권 발행량 증가를 주도했다.
기업 입장에선 상품권을 발행하면 매출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자금을 미리 끌어다 쓸 수 있다. 상품권 발행으로 신규 매출을 유도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다. 판매한 상품권이 분실 등의 사유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상품을 팔지 않고도 이익을 남길 수 있다.
고객들로선 상품권의 사용처가 갈수록 확대돼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데다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전통시장 온누리 상품권의 경우 액면가보다 5%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길거리 구둣방에서 구두·백화점 상품권을 액면가보다 싸게 살 수 있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문제는 5만원권 화폐보다 액면가가 훨씬 높은 고액상품권을 누가 구매하고 누가 어떻게 쓰는지 파악하기 어려워 리베이트, 기업 비자금 조성, 뇌물 등 불투명한 자금 거래에 쓰일 여지가 크다는 점이다.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되면서 1만원권 이상 상품권을 발행할 때 인지세를 내는 것을 빼면 당국의 감독은 사실상 없는 상태다. 액면가로 따졌을 때 지난해 8조원 이상의 상품권이 시중에 풀렸는데도 한국은행의 통화량 산정에서는 제외된다.
◇돌아오지 않는 5만원권=5만원권 환수율은 지난 3분기에 10%대로 곤두박질쳤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9월 발행된 5만원권은 모두 4조9410억원에 이르렀지만 9820억원(19.9%)만 한은으로 돌아왔다. 2009년 6월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이후 그해 2분기(0.1%)와 3분기(1.1%)를 빼고는 가장 낮은 환수율이다. 1만원권의 환수율이 95% 정도가 환수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5만원권의 환수율이 낮은 이유에 대해 한은 관계자는 “올해 3분기에는 추석을 앞두고 5만원권 공급물량을 늘린 요인도 있다”고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박근혜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국정과제로 내세운 지난해부터 5만원권의 환수율이 급락했다. 돌아오지 않는 5만원권은 개인·기업의 금고에서 잠자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초저금리와 경기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현금 보유 성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세·뇌물 등 범죄와 관련된 현금 보유가 늘어나면서 지하경제 규모를 더 키운다는 지적이 나온다.
액면가가 높아질수록 부피가 줄어들기 때문에 많은 금액을 보관하기 쉽다. 2011년에는 마늘밭에서 불법 도박 수익금 110억원이 5만원권 22만장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1만원권을 사과상자에 담으면 5억원이 들어가지만 5만원권으로 채우면 25억원을 담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5만원권이 도마에 올랐다. 새누리당 박덕흠 의원은 지난 7일 한은 국감에서 “개인이나 회사가 현금 형태로 재산을 보유하거나 세금을 피하기 위한 현금거래를 늘리는 것”이라며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은 5만원권에 대한 관리 강화 방안으로 화폐에 제조연도를 표시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은은 5만원권을 둘러싼 지하경제 논란이 거세지자 올해 처음으로 일반인과 기업을 상대로 화폐 수요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여 연내 공표할 방침이다. 김준태 한은 발권정책팀장은 “5만원권 등 화폐의 거래 및 보유 목적을 조사해 오는 12월쯤 첫 조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
[wide&deep] ‘신사임당’ 꼭꼭 숨고… 상품권 확 늘고… 지하경제 살찌우나
입력 2014-10-21 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