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판교테크노밸리 환풍구 덮개 붕괴 사고에 대한 경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행사 주최 측의 즉흥적이고 졸속한 공연 준비와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안전관리 실태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안전의식 실종, 책임 회피, 허위 보고 등 사고 발생과 전개 과정이 거의 모든 면에서 세월호 참사를 빼닮았다.
경기경찰청 수사본부는 행사진행 부분과 환풍구 시공 부분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지금까지 행사를 주관한 이데일리 등 10여곳을 압수수색했고, 행사 관계자와 시설 관리자 20여명을 소환해 조사했다. 이 가운데 6명을 출국금지 조치했다. 이 사고는 희생자 규모에 비해 직접 책임을 물을 대상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 행사를 입안한 경기과학기술진흥원 관계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다 관련 규정이 아예 없거나 미비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주최 측이 관객이 많이 모일 것으로 뻔히 예상되는 아이돌 그룹 행사에 단 한 명의 안전요원조차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최 측은 행사 전 경찰 등에 제출한 계획서에 4명의 안전요원을 배치하겠다고 했으나 서류상 요원에 불과했다. 명목으로만 존재한 안전요원은 한 번도 안전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주최 측 직원들로 이들은 자신들이 안전요원인 줄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 안전 대책이 제대로 이뤄졌을 리 만무하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행사는 이데일리와 경기과기원이 주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행사 팸플릿에는 경기도와 성남시도 주최자로 명기돼 있다. 이에 대해 경기도와 성남시는 명의를 도용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의 철저한 수사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래야 책임소재는 물론 피해자 배상·보상 책임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판교 사고 이전에도 환풍구 추락 사고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지난해에만 두 건의 환풍구 추락 사고가 발생해 1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환풍구 추락 사고는 시설 특성상 다중이 자주 이용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환풍구 안전규정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국토교통부의 ‘건축물의 설비기준 등에 관한 규칙’엔 환기량과 환풍 주기 등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덮개의 하중 기준이나 환풍구 주변 위험 경고표시 관련 규정이 없다. 전국의 모든 환풍구가 위험 사각지대란 얘기다.
세월호 참사에도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대한민국은 국제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이 사고 직후 CNN 뉴욕타임스 AP통신을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한국의 안전불감증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특히 “한국의 대다수 안전사고는 느슨한 규제와 가벼운 처벌, 광범위하고 전반적인 안전규정에 대한 무시, 경제적 발전을 우선하는 경향 등에서 비롯됐다”는 AP통신의 지적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판교 사고 후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전국 환풍구를 전수조사하겠다는 식의 사후약방문 대책만 쏟아내고 있다. 이래서는 ‘안전 대한민국’ 실현은 영영 불가능하다.
[사설] 잇따르는 대형사고 땜질 처방으론 못 막는다
입력 2014-10-20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