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황해’는 조선족을 동원한 청부살인을 소재로 했다. 한국에 돈 벌러 간 아내를 만나려고 살인청부를 수락하고 서울에 온 조선족이 등장한다. 이와 흡사하게 생활고를 겪는 조선족이 동원된 청부살인이 실제로 발생했다.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은 CCTV에 찍힌 ‘용의자의 발목’ 때문에 실마리가 풀렸다.
“작업할 사람이 있는데…사람을 좀 알아봐줘.” 지난해 9월 S건설업체 사장 이모(54)씨가 세계무에타이·킥복싱연맹 이사라는 직함을 가진 이모(58)씨를 찾았다. 각종 민·형사소송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K건설 경모(59) 사장과 소송 담당 직원 홍모(40)씨를 죽여 달라고 의뢰했다. 이 사장은 그동안 경 사장 측에 “2억원을 줄 테니 고소를 취하하라”고 회유도 하고 “내가 사실 조폭”이라며 협박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소송을 계속 진행하자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장은 청부살인 대가로 4000만원을 제시했다.
이 이사는 한 달 뒤 ‘의형제’처럼 지내던 중국동포 김모(50)씨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한국에 있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 2011년 입국한 김씨는 사무직 취업만 가능한 재외동포 비자(F4)를 소지한 탓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김씨는 이 이사로부터 착수금 300만원과 함께 홍씨의 사진 및 차량번호 등이 담긴 메모지를 받아들었다.
김씨는 두 달간 K건설과 홍씨의 주거지 등을 살폈지만 홍씨가 같은 달 회사를 그만두고 잠적해 범행에 실패했다. 이 이사는 김씨에게 1200만원을 더 건네며 “홍씨 대신 경 사장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김씨는 4개월간 경 사장 사무실 인근을 배회하다 지난 3월 20일 오후 7시18분쯤 사무실에서 나오던 그를 흉기로 7차례 찔러 살해했다.
경찰은 서울지방경찰청 산하 2개팀, 일선서 7개 강력팀으로 전담 수사팀을 편성했다. 누군가 사건 현장을 빠르게 이탈하는 장면이 멀리서 찍힌 현장 인근 CCTV가 유일한 단서였다. 경찰은 현장 진입로와 예상 도주로 주변의 CCTV 120여대를 정밀 분석했다. 용의자가 3월 3일부터 범행 당일까지 매일 현장 주변을 자전거 등으로 오가는 장면을 찾아냈다.
CCTV 속 용의자는 걸음걸이가 특이했다. 양쪽 발가락이 안쪽을 향하는 ‘내족보행’을 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이 일대 1457가구 주민 5853명을 개별 면담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 용의자가 3월 6일 오후 4시52분쯤 공항동 KT전화국 앞을 걸어갔다가 2분35초 만에 돌아오는 장면이 찍힌 CCTV 화면이었다. 이 화면에는 용의자의 ‘발목’만 나타났지만 경찰은 그의 특이한 걸음걸이를 놓치지 않았다.
2분35초 만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경찰이 착안한 것은 현금인출기였다. 당시 이 일대 현금인출기를 사용한 사람들을 추적해 김씨가 같은 시각 KT전화국 앞 현금인출기에서 2만원을 인출한 사실을 파악했다. 김씨는 CCTV에 나온 용의자와 인상착의도 비슷했다. 김씨의 통화기록과 금융거래 내역 등을 분석한 경찰은 마침내 이 사장과 이 이사의 연루 사실까지 확인했다.
김형식 서울시의회 의원이 연루된 ‘강서 재력가 살인사건’에 이어 중국동포가 많이 사는 강서구에서만 올해 두 번째 일어난 청부살인이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김씨를 살인 및 살인예비 혐의로, 이 사장과 이 이사를 살인교사 및 살인예비교사 혐의로 각각 구속했다고 15일 밝혔다. 김씨는 범행 일체를 시인했으나 이 사장과 이 이사는 혐의를 전면 또는 일부 부인하고 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중국동포 시켜 청부살해… CCTV 속 ‘발목’에 발목잡혀
입력 2014-10-16 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