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대준 (9) “너의 갈 길을 먼저 꿈꾸고 바라보고 감사하라”

입력 2014-10-16 02:22
주대준 KAIST 교수(오른쪽 두 번째)와 가족이 2007년 5월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운데)에게 안수기도를 받고 기념촬영을 했다.

난생처음 청와대를 보고 ‘언젠가 저곳에서 근무해야지’라고 기도드린 후 놀랍게도 내가 먼저 변화됐다. ‘청와대에 반드시 전산실이 생길 것이고 프로그래머를 뽑을 텐데 그때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전까지는 전산 프로그램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수업시간에 집중을 못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꿈을 품은 이후 나의 적성과 능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나는 꼭 청와대에서 근무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산 전문가, 프로그래머가 돼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생겼다.

1979년 3사관학교에서 근무할 때 결혼하고 첫아이 은혜를 낳았다. 이름대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가정을 꾸려 나가려고 기도하며 노력했다. 고려대와 인접한 서울 종암동에 살며 동네 작은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태생이 지리산 자락의 시골 출신이다 보니 큰 교회는 거부감이 있어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교회를 정할 때 제일 뒤에 앉아 예배드리는 성도들 머릿수를 세어 보고 100명이 넘지 않아야 안심이 됐다.

종암동의 작은 교회에 출석하며 노방전도도 하고, 집사 직분을 받아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느 주일예배 때 일이 터졌다. 교회 건물 지분을 가진 한 장로가 담임목사를 강단에서 몰아낸 것이다. 이 장로는 자신과 가까운 강도사를 교회 담임으로 세우려고 했다. 장로와 담임목사 간의 싸움을 보고 큰 상처를 받았다.

교회를 옮기려고 고심할 때 아내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아내는 서울 용산(삼각지)에 살던 주일학교 시절부터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에 다녔다. 결혼 이후 내가 대형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 중 한 명이 유난히 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님을 비방하는 바람에 아내는 순복음교회에 가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다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 날, 나는 생각조차 못했던 엄청난 교회 규모와 통성기도하는 성도들의 기세에 눌려 조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장충체육관 같은 교회 건물과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씀을 전하는 조 목사님에게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은 자꾸 끌렸다.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조 목사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시간이 지나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면서부터 어느새 조 목사님의 수제자가 된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고학하며 힘들었던 소년 시절부터 요셉을 내 인생의 롤모델로 삼으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조 목사님의 설교는 내가 지금까지 기도하고 바라본 것과 매우 똑같았다.

나는 날마다 조 목사님의 말씀을 먹으며 영적으로 성장했다. 조 목사님의 말씀은 내 삶을 지탱하는‘영적 비타민’이 됐고, 나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마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옥에 가두던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안티 순복음’ ‘안티 조용기’였던 주대준이 최고의 신봉자로 변화된 것이다.

조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나를 위한 말씀 같았다. “주대준 집사야. 너는 이미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청와대 전산실에 근무하는 네 모습을 먼저 꿈꾸고 바라보고 감사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미 청와대 전산실 직원이 되었다. 조 목사님 말씀의 키워드인 ‘바라봄의 법칙’의 전도사가 된 것이다. 바라봄의 원리는 기적 같은 놀라운 힘이 있었다. 전산 프로그램을 잘하지 못했던 내가 자신감을 갖게 됐다. 또 어릴 때 고아원 배추밭에서 일하며 ‘어른이 되면 미국 유학 가야지’라는 꿈이 실현될 날을 바라봤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꿈을 품고, 미국 유학을 꿈꾸던 당시 내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믿음으로 도전했다. 꿈은 나를 끌고 가며 현실이 되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