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변창배] 중국교회의 시대를 기다리며

입력 2014-10-15 02:28

방지일 목사가 103세를 일기로 하나님께 돌아가셨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을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삶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방 목사의 약력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중국에서 선교한 일이다. 1937년부터 1957년까지 21년간 산둥성에서 선교를 했다.

방 목사의 산둥성 선교는 1912년에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선교의 일환이었다. 장로교회는 그해 총회를 조직하고 박태로 목사를 첫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 일은 1907년 독노회 시절부터 6년 동안 전도국 위원장을 맡아 수고한 길선주 목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나라는 식민지가 되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세계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는 소명감의 결실이었다.

중국 선교는 그해 7월 1일 모인 제2회 황해도 노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보고로 공식화됐다. 9월에 모인 총회는 1년 중에 한 주일을 선교주일로 지킬 것과 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했다. 산둥성 라이양현에서 시작된 중국 선교는 한국교회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장로교인 총수는 14만4260명, 세례교인은 5만300명이었다. 목사는 불과 66명이었다. 1년 뒤에는 김영훈 목사와 사병순 목사를 추가로 파송했다.

한국교회의 산둥성 선교는 초기부터 미 북장로회와 긴밀한 협력 속에서 진행됐다. 윌리엄 블레이어 헌트 선교사가 통로 역할을 했다. 헌트 선교사는 직접 산둥성으로 건너가 현지의 북장로회 선교부와 협의하며 지원했다. 훗날 한국 선교사를 중심으로 라이양 노회가 설립될 때에도 미 북장로회 산하 교회들이 한국 선교사회에 이양되면서 노회로 발전했다. 미 북장로회는 1861년에 이미 산둥성 선교를 시작했다. 산둥성 선교는 한국의 장로교회와 미 북장로교의 한국선교부와 중국선교부, 그리고 중국교회의 4자가 동역한 선교였다. 협력 선교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방 목사가 중국으로 파송된 것도 이러한 산둥성 선교의 일환이었다. 그는 부친 방효원 목사의 뒤를 이어서 산둥성 라이양현에서 선교했다. 그는 ‘중국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중국 사람이 되어라’는 김인서 목사의 요청을 마음에 새기고 선교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외국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일본의 탄압도 갈수록 거세졌다.

방 목사는 가족을 고국으로 보내고 혼자 남아서 칭다오로 피난했다. 그는 빈민촌에 기거하면서 소촌압, 오가촌, 태평진 등의 교회를 개척했다. 1949년에 공산화되고 나서도 한참 뒤인 1957년에 홍콩을 거쳐서 고국으로 귀국했다. 중국교인들 2000여명을 버려둘 수 없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를 넘은 것이다.

방 목사 뒤를 이어 중국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한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수고를 기억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중국교회가 크게 성장했다. 중국교회 스스로 2012년 말 현재 세례교인이 2300만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삼자교회도, 가정교회도 모두 수난을 당한 문화혁명 이후 불과 40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문화혁명이 막바지이던 1976년 중국 공산당 한 관리가 “전 중국에 문을 연 교회는 외교관을 위한 교회 둘 뿐”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말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중국교회는 ‘고난을 이긴 교회’로 ‘교파 이후의 교회’요, ‘중국인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교회’가 되었다.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중국교회의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문화혁명으로 단절된 지도력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그 길은 팅 주교가 남긴 유훈대로 ‘중국 신학사상 건설’의 길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 세대는 족히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고난 속에 단련된 중국교회가 아시아교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세계교회를 섬기는 날을 기대해 본다.

변창배 목사 (예장통합 총회기획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