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대준 (8) “국방부 정보화 발전… 제가 기여하겠습니다”

입력 2014-10-15 02:42
주대준 KAIST 교수(왼쪽)가 청와대 경호차장 시절인 2007년 3월 은사인 고려대 김동기 석좌교수를 청와대로 초청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부대 내 수십 명의 소대장 중 능력을 인정받아 인사장교로 발탁됐다. 나름 부대 내 ‘스카우트’였다. 전방 근무가 2년쯤 지날 무렵 3사관학교 구대장 요원으로 차출 명령을 받고 후방인 3사관학교로 내려왔다. 3사관학교 교수부에서 근무한 2년은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두 번째 전환점이 됐다. 보병 장교에서 전산 장교로 주특기(병과)가 바뀌었고, 3사관학교에 입교할 때부터 계획했던 대학 진학을 준비할 수 있었다. 물론 한 번도 순탄하게 풀린 적이 없다. 혼자 감당하기에 벅찬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전산 장교가 되려면 먼저 ‘전산 위탁교육 시험’에 합격해 전산교육을 받아야 한다. 전산 위탁교육 시험 응시지원서를 제출했으나 3사관학교장 결재과정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부결됐다. 시험에 응시할 기회조차 박탈된 것이다. 어째서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안 되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입을 다물어 알 수가 없었다.

육군본부에 원서접수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 학교장은 서울로 출장을 가고 학교에 없었다. 나는 학교장을 찾아가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학교장 집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먼저 육군본부가 위치한 삼각지 인근의 다방으로 갔다. 수소문했지만 알 수가 없어 전화번호부에 적힌 학교장 이름의 동명이인, 10여명의 집에 전화를 걸어 결국 학교장 집 주소를 확보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몇 시간 동안 헤맨 끝에 초저녁이 돼서야 학교장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학교장 사모님께 정중하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응접실에 앉아 몇 시간을 기다렸다. 결국 자정 무렵에야 집으로 들어온 학교장을 만났다. 막 육군 대위로 승진한 새파란 청년 장교가 직속상관인 육군 중장과 한밤중에 면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덕에 결국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합격의 기쁨도 맛봤다.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주면 꼭 합격해 앞으로 국방부 정보화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학교장과 한 약속을 지켰다.

성균관대학군단 소속으로 성균관대 경영행정대학원에서 ‘국비 전산 위탁교육’을 받았다. 수업이 야간에만 있어 주간에는 고려대 경영학과에서 공부했다. 마케팅원론과 소비자행동 과목을 가르치던 김동기 교수는 항상 수업 시작 전 10여분 동안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 PC도 없었던 그때 김 교수는 마치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던 세례 요한처럼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시대에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컴퓨터·영어·타자치는 능력 이 세 가지는 필수 요소”라고 학기 내내 열변을 토했다.

유익한 정보와 지식을 알아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늦깎이 대학 공부를 시작한 나는 김 교수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너무나 와 닿았다. 당시 경영학과 학생들이 어렵다고 기피하는 서남원 교수의 정보처리론을 두 번이나 수강하며 정보화 지식을 습득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빛낸 훌륭한 두 교수의 가르침과 도움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다. 김 교수는 다가올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비전과 구체적인 꿈을 줬고, 서 교수는 우리나라 경영정보학 1호 박사로 내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밤에는 성균관대 경영행정대학원 EDPS 과정에서 전산프로그램을 배우는 데 집중했다.

전산 장교 위탁교육을 마친 후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소속의 정부전자계산소(GCC)에서 전 부처의 전산 직능 공직자들과 함께 ‘프로그램 실무 보수교육’을 받았다. 어느 날 점심 후 교육받는 동료들 몇몇과 경복궁 돌담을 따라 거닐다가 먼발치에서 청와대의 모습을 봤다. 난생처음으로 청와대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언젠가 저 청와대 안에 전산실이 창설되면 제가 청와대에서 근무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