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말 박근혜 대통령의 금융권 보신주의 혁파 요구는 금융의 중개기능 확충을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시중에 돈이 넘쳐난다는데, 창업·벤처기업은 여전히 기술금융에 목말라하는 답답한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현 정권 출범 이후 추진해온 창조경제가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최근 최경환 부총리의 경기부양책에도 불구하고 경기회복 속도가 기대에 못 미쳐 금융권의 적극적인 중개기능 수행이 아쉬운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치 않다. 먼저 해외를 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규제감독을 강화해 은행의 위험부담을 억제하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금융권 보신주의는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것 아니겠나. 한편 국내에서는 주택금융 규제 완화와 한은의 금리 인하가 맞물리면서 금융권 가계대출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중에 더 이상의 금융권 대출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요구에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한국금융 발전을 위해 중개기능 확충이 바람직하고 또 이를 위해 금융권의 위험부담 확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금융의 취약한 중개기능은 학술논문에서도 자주 지적되고 있는데, 이를 극복하고 성숙한 금융산업을 만드는 일은 한국경제 선진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제로 인식된다.
금융권에 보신주의가 만연하게 된 배경에 관치금융과 낙하산 인사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오는 과정에서 보신주의는 금융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이러한 영향을 두 가지만 지적해 보자. 첫째, 보신주의는 아래보다 위를 중시한다. 힘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융회사들은 당국의 의중을 살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반면에 시장의 수요와 고객의 니즈 파악 및 상품, 서비스 개발 등에는 소홀하게 되고 따라서 한국금융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다. 낙하산에 익숙한 금융회사가 차세대 리더 양성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으므로 제대로 된 경영진 승계 프로그램 마련에도 큰 관심이 없다. 둘째, 보신주의는 경영자들에게 단기 안목을 강요한다. 우리나라 금융권의 경영진 임기는 대체로 1∼2년, 길면 3년이다. 따라서 단기 성과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창조경제가 추구하는, 성과가 불확실하고 소요기간이 장기인 혁신 프로젝트의 지원은 주요 관심사가 되기 어렵다.
대통령의 보신주의 혁파 요구에 부응하여 금융 당국이 내놓은 대책은 금융회사 직원 제재를 90% 이상 감축하고, 제재 자체를 금감원에서 금융회사의 자체 징계로 위임하며, 고의·중과실이 없는 부실 대출은 면책한다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한마디로 제재 완화로 요약되는데 금융기관들의 무분별한 위험 부담을 부추겨 부실을 확대할까 우려스럽다. 설령 부실이 크게 확대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대책만으로 금융회사들이 계산된 위험 부담을 늘려 중개기능 확충을 도모할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개기능 확충의 관점에서 몇 가지 대안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금융 당국은 그간 추진해온 기술정보 DB 구축을 포함하여 혁신금융 활성화를 위한 정보 인프라 구축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올바른 정보는 계산된 위험 부담을 확대하기 위한 동력을 제공할 것이고 금융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낙하산 인사와 관치금융의 철폐 및 규제완화가 필요하다. 이는 금융 관련 권한을 최대한 금융회사로 이양하여 임직원들 스스로의 책임 하에 소비자 니즈와 시장 수요를 확인하고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도록 하는 것이 계산된 위험 부담을 확대하는 첩경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금융회사의 책임경영체제가 확립되고 중개기능이 살아나 보신주의 혁파가 가능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
[경제시평-윤석헌] 금융권 보신주의 혁파의 뜻
입력 2014-10-15 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