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일수] 일부 유가족만의 과욕일까

입력 2014-10-14 02:00

전통 형사법에서는 범죄 문제를 국가와 범죄자 개인의 대립 당사자 관계로만 보았다. 그래서 범죄 피해자의 역할을 범죄 문제에서 아예 배제하거나 중립화시켜 버렸다. 범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법질서 방위에 일차적 책임을 지는 국가라는 점, 국가만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형벌권을 행사할 적격을 갖춘 기관이라는 것, 피해자의 복수심과 사감정이 이 같은 공형벌에 개입할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형사법 체계에서는 피해자의 능동적인 재판절차 참여제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제도,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원상회복제도, 회복적 사법 등 다양한 제도들이 시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범죄 피해자들에게 이런 호황, 호시절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이러한 우대 정책이 실제 피의자·피고인들이 형사사법에서 누려왔던 무죄추정의 원칙, 사법절차상의 각종 방어권들을 위축시킨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피해자들의 사적인 응보감정에 형사사법이 휘둘리게 되고, 비합리적인 중형화, 중벌화 현상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세월호 특별법의 진통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드러났다.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가 두 번씩이나 무산된 데에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월호 피해자들의 다수를 점하는 특정 유가족 단체의 무리한 요구가 그 일차적 원인이 되었다. 최근 이 피해자 단체의 일부 임원들이 한 대리운전 기사에게 가한 폭행 사건으로 그 기세가 잠시 주춤해진 듯하지만 아직도 이들의 강성 기류는 잠재적인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피해원인조사위원회에 독립된 수사권과 소추권을 부여해야 한다든가 특검 추천을 피해자 단체의 의중대로 해야 한다는 요구는 철회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국가형법은 피해자의 중립화와 더불어 생성되었고, 형법의 힘은 피해자의 무력화(無力化)에 기초해 왔는데, 오늘날 세월호 피해자 단체의 강성화는 국회와 국가법의 권위, 권한까지도 좌지우지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현상은 법치국가 발전에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일이기도 하다. 법치국가에서도 피해자 보호를 위한 새로운 제도들이 진화를 계속해 가야 하지만 법치주의 원리를 포기하거나 훼손하면서까지 해서는 안 된다. 한 번의 예외를 허용하면 또 다른 예외의 욕구들이 봇물처럼 터져 원칙을 황폐화시키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특정 피해자 단체의 강성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면 실제 피해자가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서도록 대로를 열어주는 꼴이 된다. 이것은 법질서 영역에서 개인의 자력 구제를 원칙적으로 금한 법치원리와 상용할 수 없다. 유가족들의 슬픔과 원통함을 나누고 보듬어주는 일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객관적이어야 할 입법은 이와는 다른 차원의 일임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세월호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만이 국민 안전의 미래를 열 수 있으므로 그 조사에 비상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실제 분수를 넘은 것이다. 그 진상규명은 국가공동체의 임무이지 어떤 임의적인 사적 단체의 의지에 의존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법의 정당성은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주관적인 합리성에 기초하는 것이지 결코 이해관계가 있는 임의의 사람들의 선의지에 의존하는 게 아니다.

필시 광화문광장에 진을 치고 쏟아내는 이들 강성의 목소리 배후에는 세월호판을 이용해 자기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얄팍한 정치인들 또는 자기지배욕의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일부 편향된 전문가층의 과욕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일상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왕의 슬픔을 나누기 위해 그들을 포옹했던 팔을 우리 스스로 풀어내려야 할 때다. 슬픔을 나눈답시고 포옹한 팔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옥죄고만 있을 작정이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인정머리 없는 삶의 모습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